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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부의 일기장

“아버지 일기 중에서...” 출근길에 사촌형의 카톡 문자와 사진 석 장이 전송돼왔습니다. 무심히 사진을 띄워보고 먹먹해졌습니다. 얼마 전 고모부가 돌아가셨습니다. 대구에 살던 어린 시절에 고모댁으로 가끔 놀러 가면 교사였던 고모부는 무뚝뚝하게 앉아 계시곤 했습니다. 책을 읽으셨던 것도 같습니다. 그 이미지가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조카를 반기며 활짝 웃어도 주셨을 테지만 그런 기억보다는 ‘무뚝뚝하게 앉아’있던 모습이 상대적으로 선명하게 남았습니다. 이후 자라면서 부산으로, 다시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고모부를 뵐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편찮으시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전화 한 통 드리는 것도 차일피일 미뤘습니다. 결국은 돌아가신 후에야 영정사진을 들여다보며 후회를 했지요. 한 통의 전화가 그렇게 ..

사진이야기 2022.04.26

벚꽃은 흩날릴 때가 절정이다

서울 여의도 벚꽃길이 3년 만에 전면 개방됐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벚꽃 철마다 통제됐던 곳이지요. 개방 사흘 만인 4월 12일에 찾은 벚꽃길엔 평일인데도 가족과 연인이 많았습니다. 만개한 벚꽃에 봄바람이 살랑하고 닿을 때마다 꽃잎이 흩날립니다. 걷던 이들이 탄성을 지릅니다. 일제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사진작가가 됩니다. ‘꽃비’는 움츠리고 지친 시간을 위로하듯 상춘객들의 어깨 위로 수시로 내립니다. 마스크 너머의 표정이 꽃처럼 환합니다. ‘벚꽃 엔딩’이라고 사진 제목을 붙이려다가 망설입니다. 벚꽃은 흩날릴 때가 오히려 절정인 것 같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피는 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벚꽃잎이 휘날릴 때마다 다음 계절에는 마스크를 벗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조금씩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ㅇㅈ

봄은 왔지만...

건조한 겨울철에 큰 산불이 나면 봄기운이 찾아들 무렵 다시 산불현장으로 갑니다. 식목일을 앞두고 있다면 더 좋은 취재타이밍입니다. 상처가 여전한 현장을 돌면서 불 탄 자리에 자라난 풀이나 꽃을 찍곤합니다. 보통 '생명' '회복' '기대' 따위의 단어를 동원해 희망의 메시지를 욱여넣은 사진설명을 쓰지요. 산불 한 달만에 다시 찾아간 울진에서도 역시 검게 탄 야산에 핀 꽃을 찍었습니다. 다 타서 죽고 쓰러지고 베어질 숲에서 작은 꽃하나 찍었다고 희망을 말할 순 없었지요. 전형적인 사진과 설명을 극복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금주의 B컷] 지난 4월3일 경북 울진군을 찾았다. 213시간이라는 역대 최장 기록을 세운 동해안 산불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북면 일대의 처참한 풍경이 내..

답인 듯 위로인 듯

내가 찍은 사진에 자주 실망한다. 대개 같은 현장에서 찍은 다른 동료의 사진과 명확하게 비교될 때 그렇다. 고민하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정직한 결과물이다. 머리를 부여잡고 후회하지만 그때뿐이다. 수도 없이 반복돼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끔, 최근 들어선 자주,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해왔던 일이 즐겁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연차만큼 축적돼 온 무기력일까 싶기도 하고, 방향과 목표가 없어서일까 싶기도 하다. 사진 앞에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는다. 심장이 뛰는 건 아주 오래전 퇴화된 감각처럼 느껴진다. 여느 때처럼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공허하기 짝이 없는 질문 앞에서 몇 장면을 떠올렸다. 어제 저녁자리에서 “일이 너~무 재밌다”며 짓던 후배의 표정, 1인 시위용 마..

사진은 문장만큼 명확할 수 있는가

‘꿀잠’이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있다는 소식을 지난해에 들었습니다. 사진다큐라는 형식으로 한 번 다뤄야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타이밍을 잡지 못했습니다. 구차한 핑계지만, 다른 언론사에서 같은 형식으로 먼저 다뤘고, 딱 고맘때가 제가 조금 긴 호흡의 다큐를 취재할 상황이 아니었지요. 지나고 나서야 어디서 먼저 다루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고, 굳이 하려고 했다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싶은 것이지요. 결국 의지의 문제였다는 결론을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이거다 싶은 소재가 떠오르면 다른 소재로 전환이 잘 안 됩니다. 꿀잠이 그러했습니다. 유연하지 못한 것도 이유지만, 비정규노동자의 집이자 쉼터인 이곳을 짓는 과정부터 사진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후원한 기금으로 낡은 주택을 매입했..

사진다큐 2022.03.21

우산 그리고 환대

“지금 어디에 있어요? 박행란 동지(활동가들 사이에는 '동지'라는 호칭을 쓴다)가 강기자가 우산도 없이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며 전화를 했어요. 연락처도 없다면서.” 김경봉 꿀잠 활동가의 전화를 받았다. 버스에 막 오른 참이었다. 이날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을 지키려는 이들의 릴레이 1인 시위가 진행됐다. 꿀잠을 취재 중이던 나는 1인 시위를 지원하기 위해 나선 박행란 꿀잠 활동가와 함께 영등포구청으로 향했다. 박 활동가의 가방에 삐죽하게 고개 내민 우산 하나가 보였다. 흐렸지만 비가 올 것 같진 않았다. 출근하면 챙겨온 우산을 들고 나설 겨를이 없었다. 1인 시위가 시작되고 곧 비가 내렸고 우산을 챙겨갔던 박 활동가가 피켓을 든 시위자 머리 위로 우산을 받쳐주었다. 빗발..

한 사람의 세계를 만나는 일

한노아씨는 사진다큐를 하며 만났습니다. 그는 상업사진을 찍는 작가입니다. 코로나 이후 일거리가 줄자, 지난 4월부터 배달노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스쿠터에 올라 음식배달을 하다 보니, 새로운 시선을 얻게 됐습니다. 노아씨는 시대를 기록하겠다는 소명으로 배달현장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그간 작업을 모아 사진전을 열기도 했지요. 그는 필름으로 찍고 직접 현상·인화하는 아날로그방식을 고집했습니다. “더 무겁게 책임을 지기 위해 선택한 자세”라고 하더군요. 한 컷 한 컷 셔터를 누를 때마다 질문을 던진다고 했습니다. 노아씨를 취재하면서 ‘내가 찍는 사진에 난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어떤 질문을 하고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진기자가 사진작가를 카메라에 담는 건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진을 통..

사진이야기 2021.09.27

나와 매일 친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제주 제주” 노래를 해서 선택의 여지없이 오게 된 제주였습니다.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저 역시 그 노래의 대열에 합류할 이유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와서 며칠은 그저 ‘한달살이’라는 유행을 좇아 온 것인지 스스로 묻다가, 느슨한 ‘루틴’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나만의 제주살이’가 만들어졌(다고 믿)습니다. 일어나면 동네 바닷가를 산책하고, 마음 가는 대로 걷거나 걸으며 사진을 찍고, 평소 무심히 지나치던 것에 시선을 던지고, 음악을 듣게 되고…. 다 열거할 수 없는 것들이 여기 제주에서 저의 삶에 들어왔습니다. 새로운 생활의 가능성에 대한 발견이기도 하고, 내 안에 잠재된 무언가를 더듬어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제주로 오던 날, 나와 더 친해지는 시간을 보내라는 친구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사진이야기 2021.06.21

매일 걷고 있습니다

한 달을 지내보겠다는 것 말고는 구체적인 계획 없이 제주로 왔습니다. 먼저 ‘한 달 살기’를 했던 이들의 경험담을 검색하면 참고할 정보들이 줄줄이 나왔겠지만, 그냥 외면했습니다. 하루의 시작은 눈 뜨면 바닷가를 거닐면서 ‘오늘 뭘 할까’ 생각합니다. 답은 뭐 정해져 있지요. 걸어보자는 겁니다. 아침을 간단히 차려먹고 느긋하게 시작합니다. 하루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하루는 북쪽으로, 어떤 날은 올레길로, 또 다른 날은 오름을 향해 걸었습니다. 사실, 걷는 것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습니다. 왕복 거리를 감안해 적당히 걷다가 돌아오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긴 시간 걷는 일이 익숙하진 않지만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와서는 타인과 대면해 얘기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만, 걷는 순간에는 온전히 ‘나와의 대면’이..

사진이야기 2021.06.11

하늘과 바다를 매일 보고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제주에서 한 달 휴가를 보내게 됐습니다. 근속 휴가에다 연차를 보탰습니다. 쉬고 싶어 긴 휴가를 낸 것이 아니라 써야 할 휴가가 생기니 길게 쉬고 싶어 졌습니다. 제주 구좌읍의 한적한 마을에 독채 민박을 구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길을 걸어 주소지에 닿았을 때는 해거름이었습니다. 짐가방을 풀기도 전에 민박집 지붕 위에 드리운 하늘을 보며 ‘잘 왔구나’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작정한 휴가였지만, 막상 와서 보니 그 ‘아무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몸 가는 대로, 마음 시키는 대로 느슨하고 즉흥적인 하루하루 살아보자는 정도에 합의를 봤습니다. 비슷하지만 다른 하루하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간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매일 하늘과 바다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

사진이야기 2021.06.08

문 앞에서

'바로 저 문이었구나' 눈앞의 문은 앞서 출장을 경험했던 동료들이 얘기했던 바로 그 문이었습니다. 굳게 닫힌 문 앞에는 기자들이 바짝 붙어 섰습니다. 들었던 말에 의하면 선한 얼굴을 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미국 기자들에게 속아선 안 됩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 띤 표정으로 인사를 합니다만 딱 고만큼만 받아서 웃어주되,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닫힌 문 너머에는 한미 양국의 정상들과 참모들이 회담을 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기자들이 먼저 자리를 잡지만, 이곳에서는 회의 중에 잠깐 문이 열리고 기자들이 들어가 취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미 정상회담 출장을 하루 앞두고 한 동료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 전화였지요. 그는 트럼프 시절 문 ..

사진이야기 2021.05.29

컵라면을 먹으며

늦은 밤, 서울공항에 내려 코로나 진단검사를 받았습니다. 면봉이 코 깊숙이 들어오자, 역시나 기침이 났습니다. 예상보다 덜 아팠지만 꾹 참으려다 터진 재채기에 면봉을 든 간호사에 민망하고 미안했습니다. 한미정상회담 하루 전 워싱턴에서도 진단 검사를 받았습니다. 백악관에서 나온 의료진이었습니다. 면봉이 콧구멍으로 들어올 때 반사적으로 긴장을 했지만 서너 차례 간질이다 말더군요. 설마 이게 다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스크를 내려 입을 벌리려는데 검사가 끝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뒤 음성이라고 통보를 하더군요. 제대로 된 검사일까, 의심이 들면서도 같은 검사라면 왜 굳이 면봉을 깊이 쑤셔 넣어 고통스럽게 하는 걸까, 의문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서울공항을 떠난 버스는 집이 아니라 김포의 한 호텔로 ..

사진이야기 2021.05.26

'꽃 한 송이 놓지 못했구나'

'입양의 날'(5월11일)이라고, 양부모 학대에 숨진 정인이가 묻힌 경기 양평의 한 공원묘원으로 향했습니다. 묘원에 거의 도착할 무렵에야 달력에도 없는 '입양의 날'과 '평일 낮'이라는 애매한 시간에 정인이의 묘소를 떠올리는 발상이 지극히 '사진기자적'이라는 생각했지요. 묘원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군데군데 일찍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팻말만이 햇볕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정인이의 자리를 찾아 보도를 통해 익숙한 사진을 가만 들여다보다가, 묘역을 느릿느릿 한 바퀴 돌았다가, 축대 벽에 붙은 나태주 시인의 추모시를 읽다가, 방문객들이 놓고 간 선물을 훑어보다가, 몇 장의 사진을 찍다가, 반가운 인기척을 들었습니다. 60대쯤으로 보이는 한 여성이 쓰레기봉투를 든 채 익숙하게 묘소 주변 오래된 음식물..

사진이야기 2021.05.15

취재 마무리는 기념사진

노년에 한글을 배워 시를 쓰고 시집도 냈다는 ‘칠곡 할매’들은 이 코로나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할매’들의 한글공부 이야기를 담은 다큐영화 기사를 읽다 문득 궁금했습니다. 경북 칠곡군을 찾았습니다. 지난해 말 코로나 3차 유행 이후로 ‘할매’들의 배움터는 다시 문을 닫았습니다. 학교 가서 공부하는 즐거움을 감염병에 잃은 어르신들은 “하루하루가 참 지엽다(지겹다)”고 했습니다. “자꾸 이자뿐다(잊어버린다)”는 할매들은 ‘감’을 잃지 않으려고 일상을 삐뚤빼뚤 글로 옮겨도 보고,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두세 쪽이라도 책을 읽었습니다. “배우고 난깨 인제 풀 한 포기도 예사로 안 보이더라고예.” 북삼읍 숭오2리에서 만난 봉재순 할머니의 말입니다. 배움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할머니는 공..

사진다큐 2021.04.06

소심한 저의

신문 1면에 여의도 벚꽃 사진이 실렸습니다. 사진 제목은 “여의도 벚꽃대궐…오늘부터 윤중로 보행통제” 뒤 이은 사진설명의 첫 문장은 “서울 여의도 윤중로를 찾은 시민들이…”로 시작합니다. 마지막 바이라인 “강윤중 기자.” 네, 맞아요. 바로 접니다. ‘윤중’이라는 그리 흔하지도 않은 단어가 두세 줄 되는 글에 세 번씩이나 등장하니 좀 낯설다가 민망해지기까지 하더군요. 윤중로를 검색하면 ‘여의서로’로 뜹니다. “여의서로의 일부 구간”이라는 설명도 있지만 어쨌든 “여의서로를 찾은 시민들이…”로 시작되어야 하는 사진설명이지요. 그럼에도 사람들 입에 붙어 익숙한 ‘여의도 윤중로 벚꽃’이 계속 쓰이고 있는 겁니다. 사실, 사진설명을 쓸 때 멈칫했습니다. 여의서로로 써야할까. 하지만 윤중로로 쓰기로 했습니다. 다들..

사진이야기 2021.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