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설마'

나이스가이V 2015. 8. 31. 08:00

북한이 포격 도발을 감행한 다음날 연천으로 향했습니다. 전날밤 딸래미는 울었습니다.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도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더러 오간 모양입니다. 아빠가 포탄이 떨어졌다는 연천 지역에 일하러 간다는 말에 공포와 두려움을 느꼈던 겁니다. “아빠 가지마. 안 가면 안 돼?”라며 질질 짰습니다. 경험이 드문 아이에게 북의 포격과 더불어 난무하는 무시무시한 전쟁 언어들은 그대로의 공포로 다가올 테지요.

 

아이의 걱정과 달리 저는 연천으로 향하면서 뭘 찍어야 하나?’를 걱정합니다. 전쟁의 가능성은 늘 존재하지만 설마하는 마음이 그 가능성을 압도합니다. 눈앞의 위기보다 코앞에 놓인 일에 더 신경이 쓰입니다비슷한 경험들로 인해 무감해졌기 때문이지요. 

 

이 무뎌짐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건·사고현장으로 달려가야 하는 직업이지만 현장에서 닥칠지 모르는 위험상황에 대해 그다지 고민하지 않습니다. 안전을 먼저 생각해 몸을 사리면 남들보다 못한 결과물을 얻을 확률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큰 비가 내린 뒤 떠내려 온 지뢰를 탐지하는 장면을 취재하기 위해 지뢰가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바닥을 뒷걸음질하며 사진을 찍던 기억이 있습니다. 현장에서 벗어난 후에야 위험했구나깨달았습니다. 크고 작은 위험의 가능성 앞에 '설마' 마인드로 무장합니다. 심지어 북의 도발이 전쟁으로 이어진다해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에 대한 매뉴얼도 없습니다.  

 

 

북한군이 쏜 포탄이 떨어진 인근 주민들이 몸을 피한 연천 중면사무소 대피소 앞에는 기자들이 북적였습니다지하 대피소에 10여명의 주민들이 앉아 있었고 일부 주민은 갑갑했는지 밖에 나와 앉았습니다. 어쨌든 주민들은 대피소로 피했는데 기자와 면사무소 직원, 식사 자원봉사자들은 면사무소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황이 참 모순이었지요. ‘전쟁에, 포격에 주민들만 위험한가? 포탄은 기자를 피해가나?’

 

방송이나 신문의 전쟁불사’ ‘일촉즉발등의 자극적 보도에 비해 연천 대피소는 오히려 평화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북의 추가 포격 위협을 설마하며 기다리는 저를 포함한 기자들은 오랜만에 만난 동료들과 얘기꽃, 웃음꽃을 피웁니다.

 

 

현장의 기자들은 주민들의 공포와 불안한 분위기 등 현장 표정을 스케치해 사진과 글, 영상으로 국민에게 전달해야 합니다만, 사람들로 북적이는 현장은 농촌마을에 오랜만에 찾아든 활력이 느껴지더군요. ‘전쟁은 무엇이며 공포의 실체는 있기라도 한 것일까묻게 됩니다. 당대표, 도지사, 장관 등이 줄줄이 대피소를 방문했습니다. 선거가 다가오고 있지요. 전쟁의 공포에 맞는 혹은 가까운 이미지를 찾아내기가 어렵습니다. 한편 기자들이 공포의 분위기에 무감하면서 그런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것은 거짓이지요.

 

 

 

남북 권력자들이 이런 극한 대치의 궁극적 수혜자가 되는 것처럼, 뉴스도 기사 조회수 증가, 시청률 증가, 신문 판매 증가라는 이익을 획득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연천에서 무사히 돌아온 아빠를 반기는 딸아이의 목소리가 휴대전화 저편에서 들려왔습니다. 아이도 이런 경험을 통해 전쟁의 공포로부터 점점 무뎌지겠지요.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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