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세이&B컷 32

벚꽃은 흩날릴 때가 절정이다

서울 여의도 벚꽃길이 3년 만에 전면 개방됐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벚꽃 철마다 통제됐던 곳이지요. 개방 사흘 만인 4월 12일에 찾은 벚꽃길엔 평일인데도 가족과 연인이 많았습니다. 만개한 벚꽃에 봄바람이 살랑하고 닿을 때마다 꽃잎이 흩날립니다. 걷던 이들이 탄성을 지릅니다. 일제히 휴대전화를 꺼내 들고 사진작가가 됩니다. ‘꽃비’는 움츠리고 지친 시간을 위로하듯 상춘객들의 어깨 위로 수시로 내립니다. 마스크 너머의 표정이 꽃처럼 환합니다. ‘벚꽃 엔딩’이라고 사진 제목을 붙이려다가 망설입니다. 벚꽃은 흩날릴 때가 오히려 절정인 것 같습니다. 이 순간을 위해 피는 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벚꽃잎이 휘날릴 때마다 다음 계절에는 마스크를 벗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조금씩 커지는 것 같았습니다. /ㅇㅈ

봄은 왔지만...

건조한 겨울철에 큰 산불이 나면 봄기운이 찾아들 무렵 다시 산불현장으로 갑니다. 식목일을 앞두고 있다면 더 좋은 취재타이밍입니다. 상처가 여전한 현장을 돌면서 불 탄 자리에 자라난 풀이나 꽃을 찍곤합니다. 보통 '생명' '회복' '기대' 따위의 단어를 동원해 희망의 메시지를 욱여넣은 사진설명을 쓰지요. 산불 한 달만에 다시 찾아간 울진에서도 역시 검게 탄 야산에 핀 꽃을 찍었습니다. 다 타서 죽고 쓰러지고 베어질 숲에서 작은 꽃하나 찍었다고 희망을 말할 순 없었지요. 전형적인 사진과 설명을 극복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금주의 B컷] 지난 4월3일 경북 울진군을 찾았다. 213시간이라는 역대 최장 기록을 세운 동해안 산불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북면 일대의 처참한 풍경이 내..

답인 듯 위로인 듯

내가 찍은 사진에 자주 실망한다. 대개 같은 현장에서 찍은 다른 동료의 사진과 명확하게 비교될 때 그렇다. 고민하지 않았고, 움직이지 않은 것에 대한 정직한 결과물이다. 머리를 부여잡고 후회하지만 그때뿐이다. 수도 없이 반복돼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가끔, 최근 들어선 자주,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해왔던 일이 즐겁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연차만큼 축적돼 온 무기력일까 싶기도 하고, 방향과 목표가 없어서일까 싶기도 하다. 사진 앞에 좀처럼 뜨거워지지 않는다. 심장이 뛰는 건 아주 오래전 퇴화된 감각처럼 느껴진다. 여느 때처럼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공허하기 짝이 없는 질문 앞에서 몇 장면을 떠올렸다. 어제 저녁자리에서 “일이 너~무 재밌다”며 짓던 후배의 표정, 1인 시위용 마..

우산 그리고 환대

“지금 어디에 있어요? 박행란 동지(활동가들 사이에는 '동지'라는 호칭을 쓴다)가 강기자가 우산도 없이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며 전화를 했어요. 연락처도 없다면서.” 김경봉 꿀잠 활동가의 전화를 받았다. 버스에 막 오른 참이었다. 이날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을 지키려는 이들의 릴레이 1인 시위가 진행됐다. 꿀잠을 취재 중이던 나는 1인 시위를 지원하기 위해 나선 박행란 꿀잠 활동가와 함께 영등포구청으로 향했다. 박 활동가의 가방에 삐죽하게 고개 내민 우산 하나가 보였다. 흐렸지만 비가 올 것 같진 않았다. 출근하면 챙겨온 우산을 들고 나설 겨를이 없었다. 1인 시위가 시작되고 곧 비가 내렸고 우산을 챙겨갔던 박 활동가가 피켓을 든 시위자 머리 위로 우산을 받쳐주었다. 빗발..

먹고 사는 일

시골장터에서 나물을 팔던 상인이 좌판 뒤 저만치 떨어져 앉아 허겁지겁 늦은 점심을 먹습니다. 손님이 나물 3000원 어치를 싸달라고 하자, 나물을 검정 비닐봉지에 담아 들고 나물값을 받으려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손이 앵글 안에 들어왔고 시선을 붙잡았습니다. 찰나의 순간에 손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적지 않았습니다. 햇볕에 그을린 손이 거칠었습니다. 손등의 살갗은 터서 갈라졌습니다. 좀 전까지 나물 다듬던 손은 흙투성입니다. 손톱 사이에 까만 흙이 또렷합니다. 나물값을 받으려 내민 손은 밥 먹던 젓가락을 움켜쥐었습니다. 카메라 모니터로 사진을 확대해 보는 동안, 가슴이 저릿해지고 눈자위가 시큰해졌습니다. 살아가는 일에 대한 강한 은유로 다가왔습니다. 세월이 내리고 억척이 스며든 ‘어머니’의 거친 손을 공경과..

연 날리는 아이

하늘에 연이 날아올랐습니다. 아이는 바람이 걸리지 않는 언덕 제일 높은 곳에서 연줄을 잡았습니다. 높이 오른 연이 자랑스러운 듯 미소 한가득 머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 건너의 고향집에서 하던 놀이였을 거라 짐작합니다. 연이 날고 있는 맑은 하늘과 하늘 아래 나무와 천으로 엮은 허름한 집들이 대조를 이뤘습니다. 다행히도, 정말 다행스럽게도 연은 구름 쪽이 아니라 파란하늘 쪽에 날고 있었습니다. - 7일 방글라데시 콕스 바자르 하킴파라 로힝야 난민캠프에서

그들의 뒤통수

신문에 ‘금주의 B컷’이라는 코너가 신설됐습니다. B컷은 A컷에 밀려 쓰지 못한 아까운 사진을 말하지만 신문에 쓰기 부족한 사진의 의미도 있습니다. 나름 골라냈으나 지면에서 외면받은 사진뿐 아니라 아예 폴더 내에서 잠자던 사진도 B컷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코너가 생기다보니 삭제 직전에 기사회생해 'B컷'의 지위를 당당하게 누리게 되는 사진이 늘 것 같습니다. 신문에 쓰지 못하는 사진을 신문에 쓰는 것이니 B컷이 아니라 A컷이 되는 셈이지요. 아래 사진들은 B컷 코너를 위해 준비했지만, 지난 주말 ‘정치 덕후’ 커버스토리에 꼽사리 끼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뒤통수 보고 누군지 맞혀 보시라'는 퀴즈가 되었던 것이지요.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찍어두었던 사진입니다. 청문회에 출석한 증..

아이들이었을까

새들이 날아올랐다. 새들은 공중에서 배회했다. 왜 하필 그 장면이 카메라에 들어왔을까. 장소의 특수성과 연결 지을 수밖에. 지난 12일 안산 단원고에서는 세월호 참사 당시 2학년이었던 생존 학생들의 졸업식이 열렸다. 졸업식이 열리던 그 시간 새들은 학교 건물 위를 맴돌고 있었다. 어딘가로 날아가지도 그 무리가 흩어지지도 않았다. 그저 날고 있는 새로 보이지 않은 이유다. 사고로 희생된 아이들의 넋이라도 실어왔을까. 아이들의 메시지라도 전하러 왔을까. 물의 부자유와 대비되는 하늘의 자유를 누리는 새들을 보며 아이들도 그랬으면 하고 바랐다. 354명이 입학했지만 이날 86명이 졸업했다. yoonjoong

물그림자

물에 투영된 산과 겨울나무와 석탑이 선명하다. 한 폭 그림처럼 시선을 잡는다. 거꾸로 봐도 다르지 않다. 무엇인 실재이고 무엇이 현상인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고, 빛이 변하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물그림자다. 땅을 딛고선 것과 달리 물에 투영된 사물은 불안하다. 그래서 거짓이다. 눈을 즐겁게 하지만 만질 수 없는 신기루다.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신기루가 진짜를 대체하고 있을까. 나는 내 속에 얼마나 많은 거짓과 가짜를 참과 진짜로 가장하고 있는 걸까. 20여 년 전 복원됐다는 저 석탑도 백제의 탑은 아니다. 거짓을 투영하고 있는 연못 위 또 다른 거짓이라. 거짓의 거짓은 참인가, 더 큰 거짓인가. 물그림자를 보고 든 상념. 2015년 1월 23일. 익산 미륵사지에서 yoonjoong

가을을 타다

나뒹구는 낙엽을 보며 문득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찬바람 불고 물든 단풍잎 흩날리니 ‘막연한 그리움’도 고개를 들었습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기껏 ‘가을이니까’ 내지는 ‘다들 가을에는 그렇지 않나’하는 질문으로 되받습니다.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낙엽을 보며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은 요맘때 많은 이들이 버릇처럼 하는 말들이 만들어 놓은 '강요된 감정'은 아닐까하는 의문도 품어봅니다. 지인들과 술자리가 많아지는 가을입니다. “날 선선해지면 한 잔 하자”했던 여름의 약속이 드러난 핑계이지만, 선선한 바람과 문득 찾아드는 외로움에 술 한 잔의 위로를 서로 주고받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그 실체가 조금 모호한 감정이지만 이번 가을에는 쓸쓸함이든 그리움이든 외로움이든 그대로 한 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