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다큐 51

다큐 이상의 다큐...낙엽 지는 가을에

J선배와 사진다큐 회의를 했습니다. 보통 그렇지만 회의는 막연한 가운데 시작합니다. 막연함이야말로 회의의 조건인 셈이지요. 정동길의 어느 한적한 아지트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말들을 나눕니다. 적당한 조바심에 한숨도 더해 지곤합니다. 막연함을 떨쳐내지 못한 채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며 회의 장소를 나서다 배롱나무 낙엽 앞에 멈췄습니다. 낙엽을 주웠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특유의 모양과 다양한 색의 변화가 보였습니다. 같은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뭉뚱그려 ‘무슨 나무의 낙엽’으로 불리기엔 이파리마다 개별성을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회의 중에도 ‘단풍으로 할 수 있는게 없을까’하는 얘기는 있었지만, 역시 막연했지요. 고개들고 걷다보면 그냥 밟고 지났을 것을, 회의에 한마디 나왔다고 낙엽을 들여다보게..

사진다큐 2018.11.04

밥 두 그릇

김의정씨(가명)는 홀로 사는 50대 남성입니다. 그는 가난하고 아픕니다. 이틀을 함께 보냈습니다. 다친 다리에 통증을 느끼면 12개의 알약을 털어 넣었습니다. ‘식후 30분’이라 써 있는데 식사는 먹는 둥 마는 둥 했지요. 애초에 ‘50대 고독사가 많다’는 뉴스에서 시작한 다큐였습니다. 고독사를 찍을 수 없어, ‘고독사 위험군’에 속하는 대상으로 섭외를 했습니다. 혼자 밥 먹는 모습을 찍고 싶었습니다. “평소 어떻게 드시냐?” 물었더니, “뭐 대충 고추장에 비벼서 먹는다”고 했습니다. 밑반찬도 없이 말이지요. 취재를 마무리할 무렵, 그가 쌀을 불려 밥을 지었습니다. ‘마지막 사진 컷이 되겠구나.’ 그는 반쯤 남은 카레 가루를 들어보더니 야채를 사왔습니다. 10500원을 썼습니다. 그에겐 가볍지 않은 지출..

사진다큐 2018.10.22

"당신이 가난을 알아?"

제가 사는 집 가까이에 백사마을이 있습니다.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고 불리는 곳이지요. 이사 와서 자주 다녔습니다. 끊어진 듯 연결되는 골목을 무작정 따라 걷는 게 좋았습니다. 골목이 주는 묘한 위안이 좋더군요. 미로 같은 골목을 뛰며 놀던 어릴 적 추억이 소환되곤 했습니다. 13년 전 ‘포토르포’라는 기획면에 사진과 글을 실었습니다. ‘달동네 골목골목 꿈이 익는다’는 제목으로 나간 기삽니다. 고단한 삶이 드러나는 곳이지만 골목마다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서 꿈을 읽으려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랬습니다. “중계동 산104번지에는 여느 해바라기보다 고개를 더 길게 빼고 있는 해바라기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달’동네의 ‘해’바라기는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주민들이 심은 꿈이 아닐까.” 좀 오그라들지요..

사진다큐 2018.10.08

"둘이 묵으이 맛나네"

추석을 앞두고 신안군 안좌도 오동리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왜 하필 그곳에 갔을까, 궁금해 하는 분들이 주변에 서너 명 있더군요. ^^ 오동리 마을은 사진기자 ㅂ선배가 나고 자란 고향입니다. 그 선배의 소개로 마을 이장님과 통화하고 다큐길에 오르게 된 것이지요. 수년 전 다큐하러 어느 농촌을 찾았다가 사기꾼으로 의심을 산 적이 있습니다. 이거다 싶은 사진을 못찍어 다양하게라도 찍으려다보니 긴 시간이 필요했지요. 종일 옆에서 이것저것 묻고 사진 찍고 하다보니 ‘이 사람 뭐지?’ 했던 것이지요. 기자라고 다시 신분증을 내밀어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안전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사람을 보증으로 내세웠던 것이지요. 안좌로 들어가는 배 안에서 선배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좀 누추해도 우리집 가서 자면 된다..

사진다큐 2018.09.26

버거운 다큐

사진다큐는 소재를 찾고 회의하고 결정하고 연락하고 일정을 잡으면서 시작합니다. 일단 취재원을 만나 얘기 나누고 카메라를 들면 웬만하면 다른 소재로 갈아타기는 어렵습니다. 대체로 어렵게 취재를 허락한 취재원에 대한 예의도 아니지요. 마감시간이 제법 남았는데도 이미 급해진 마음에 ‘이건 아니다. 다른 거 찾자’는 결단은 좀처럼 내리지 못합니다. 이번 다큐도 그랬습니다. ‘이주노동자의 여름휴가'를 찍어보자고 시작했지만 머릿속에 미리 그렸던 그런 휴가는 없었습니다. 달리 전개되는 상황과 애초의 의도 사이에서 수시로 갈등했습니다. 어정쩡한 상태로 ‘이정도면 됐다’며 버릇처럼 합리화를 했지요. 결국 이주노동자의 ‘여름휴가’는 바다로 놀러가는 ‘하루짜리 캠프’로 대체됐고, 피하고 싶었던 평범한 기념사진이 메인사진이 ..

사진다큐 2018.08.23

'곰의 일'

지난 주 마감했던 는 멸종위기종인 ‘반달가슴곰 번식연구’에 대한 것이었지요. 작년 가을 무렵 반달가슴곰 취재를 시도했다가 시기가 맞지 않아 다음을 기약했었습니다. 잊고 있던 반달곰을 다시 떠올린 건 지난 3월 취재했던 평창동계패럴림픽이었지요. 마스코트가 반달가슴곰 ‘반다비’였습니다. 뭐 이런 순간에 몇 달 후 지면을 어렴풋이 그려보기도 하지요. 마음을 굳힌 건 ‘반달가슴곰 세계 최초 인공수정 출산 성공’이라는 뉴스였습니다. 지난해 한 차례 취재시도, 패럴림픽 마스코트, 세계 첫 인공수정 출산 등 일련의 과정이 ‘거부할 수 없는' 계시로 다가왔습니다. +종복원기술원 야생동물의료센터 반달곰 인공수정 연구진 반달곰 복원에 애쓰는 종복원기술원 야생동물의료센터에 연락을 하고, 그날 밤 구례로 달려갔습니다. 다음날..

사진다큐 2018.07.24

이런 가족

7년 전 게이(남성동성애자)를 소재로 사진다큐를 했습니다. 지면에 담지 못한 얘기를 모아 4회에 걸쳐 부서 블로그에 취재기를 올렸습니다. 일간지 취재 시스템에서 제법 긴 시간을 들여 취재했고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많았습니다. 당시 블로그에 혐오의 표현과 종교적 교리로 반박하는 댓글이 몇 있었습니다. 그중 또렷이 기억에 남는 글은 “당신, 게이지?”였지요. ‘내가 잘 써서 그랬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이 흘렀고 그때 인연은 이어졌습니다. 가정의 달인 5월이고, 법과 제도로 인정되지 않는 ‘성소수자의 가족’에 대한 얘기를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성소수자 공동주택 ‘무지개집’을 사진다큐로 다뤘습니다. ‘무지개집’은 다양한 성적지향의 입주자들이 모여 사는 집입니다. “다큐가 되겠는지..

사진다큐 2018.05.29

사진다큐의 완성은...

새해 첫 다큐에는 나름의 기준이 있습니다. 소재가 무겁지 않고 되도록 희망적일 것과 웬만하면 새해의 의미가 사진에서 읽히면 더 좋겠다는 것이지요. “이번 다큐는 ‘개’다” '무술년 황금개띠의 해’에 꽂혀 서둘러 결정했습니다. 이미 ‘시각장애인 안내견’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습니다. 분명한 건, 제가 쉽게 생각하는 건 누구나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개 기사’가 여기저기서 다뤄졌습니다. 장애인 안내견부터 입양견, 반려견, 유기견까지 사진기획도 다양했습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개 아닌 다른 소재는 찾아지지 않았습니다. 12년에 한 번 오는 ‘개띠 해’의 첫 달에만 가능한 소재다보니 욕심을 죽일 수 없었던 겁니다. '뭘 할까' 하던 중에 지난해 봤던 ‘홀몸노인(독거노인) 가구 수’ 증가에 대한 통계기사가 갑자..

사진다큐 2018.01.30

정작 '꿀잠'은 내가 잤다

공사 중인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에 대한 사진다큐 기사가 지난 29일자 지면에 실렸습니다. 전날 미리 온라인에 뜬 기사를 본 노순택 작가께서 격려의 메시지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기사와 함께 올렸습니다. 지난 6월15일 열린 노순택 작가의 사진전 작가와의 만남 뒤풀이 자리에 합류해 막걸리를 마시다 다큐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게 된 것이니, 그의 지분도 들어있는 것이지요. 계획된 다큐 게재일이 한 달이나 남은 6월 말쯤, 분위기나 보려 ‘꿀잠’ 공사현장을 처음 찾은 것을 시작으로 주중 2~3차례 오후시간에 공사현장을 찾았습니다. 물론 사진을 어떻게 찍을까를 고민하며 다녔습니다만, 막상 현장에서는 카메라를 놓고 일을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사진 정택용 일하는 장면 하나 메인 컷으로..

사진다큐 2017.07.30

'광장 노숙'

사진다큐 소재를 선택할 때 ‘지금 왜 이걸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대게 시의적인 이슈거나 우리 사회의 만연한 문제와 그와 관련한 삶이 이유가 되지요. 이번에 지면에 실은 ‘광화문캠핑촌’ 다큐는 앞의 이유에다 ‘마음의 빚'이라는 사적 이유도 더해졌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에 반발한 예술인들이 광화문광장에 텐트를 치고 노숙농성을 시작한 지 70일이 넘었습니다. 취재를 오가며 광장을 지날 때마다 부채감 같은 것이 달라붙었습니다. 하룻밤이라도 노숙에 동참해야겠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바쁘다, 날이 춥다 등 온갖 핑계를 둘러댔지요. 농성 첫날부터 광장생활을 하고 있는 ‘페친’ 노순택 사진가의 글과 사진을 볼 때마다 속이 따끔거렸습니다. 노 작가는 지난해 11월 어느 날인가 제게 “..

사진다큐 2017.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