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사소한(?) 인연과 새해 첫 책

나이스가이V 2018. 1. 7. 14:14

‘11을 다짐했습니다. 얇은 그림책을 읽더라도 한 주에 한 권은 읽어야겠다는 것이지요.

 

올해 첫 책으로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동아시아)을 읽었습니다. 베스트셀러 같은 순위는 애써 외면하는 편이지만, 지난 연말 이 책이 경향신문을 포함해 각 언론의 올해의 책’ ‘올해의 작가부문에 일제히 올랐지요. 좋은 평가도 한 몫을 했지만, 그보다 작가와의 사소한 인연이 즉시 책을 주문해 읽게 만들었습니다.

 

지난해 5월 성소수자 관련 사진기획을 할 때였습니다. 취재원인 이호림씨를 만난 곳이 고려대 보건과학과대학원이었지요. 김 교수의 직장이지요. 호림씨는 박사과정 학생이었습니다. 취재가 끝나고 역학연구실 동료들과 기념사진을 찍어드리겠다고 하니, 누군가 교수님을 모셔오겠다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제 머릿속 교수님의 이미지는 머리가 희끗하고 나이 지긋한 모습이었습니다. 연구실로 들어서는 교수님은 젊어서 대학원생 같아 보였지요. ‘~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구나했던 그때의 기억이 납니다. 제 나이의 지점을 가늠하게 되는 순간은 이렇게 난데없이 찾아들지요. 호림씨 메일로 기념사진을 보냈고 동료들과 교수님이 좋아하셨다는 답을 받았었지요. 이 정도면 인연 맞지요? ^^

 

   +김승섭 교수(오른쪽)와 이호림씨(오른쪽 두번째)와 연구실 식구들.

 

작가는 사회역학자입니다.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연구자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인권감수성과 공감능력이 제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몇 문장을 옮겨보면,

 

사회적 폭력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한다.”(22p)

 

한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이들을 아프게 했던 원인의 원인이 보인다. 그 원인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71p)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안다. 내가 해고를 당했을 때 한국사회가 나를 돌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95p)

 

법정에서 노동자들은 보통 이길 수 없다.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어떤 변호사는, 어떤 학자는 그의 편에 서 있어야 한다.(클랩 교수)”(108p)

 

“...참사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에 대해 알 길이 없다. 아픔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책이 있을 리 없다. 그 참사의 원인을 제공했던 국가는 그 아픔을 개개인에게 넘긴 채... 세월호 참사마저 그렇게 보내고 나면, 우리에게 공동체라고 부를 무엇인가가 영영 사라져버리지는 않을까...” (166p)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 (176p)

 

성적지향은 흡연과 같이 개입해서 바꿀 수 있는 위험요인이 아니라 연령, 인종, 성별과 같은 사회인구학적 인자다.”(210p)

 

혐오의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를 멈추게 할 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도 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작게라도 배운 게 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219p)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303p)

 

 

작가는 혐오, 차별, 고용불안, 재난 등 상처와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건강을 연구한 결과로 글을 썼습니다. 차가운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참 따뜻한 글, 따뜻한 과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교수의 연구는 우리 사회에서 상처받는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다짐 같았습니다. 그는 연구연대하고 있습니다.

 

저야 사진쟁이니 기승전사진아니겠습니까. 자주 되뇌는 질문이 돌아옵니다. ‘내 사진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회적 고통과 상처를 안고 사는 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사회적 치유로 즉각 이어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참 먼 길이지요. 김 교수의 연구가 또렷한 근거를 제시한다고 우리 사회가 단박에 변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의 연구에 비할 바 아니지만, 제 사진도 비를 함께 맞는매개였으면 합니다.

 

곁가지 인연 하나 더. 연말 회사 선배를 따라나선 점심식사 자리에서 이 책 출판사 대표를 만났습니다. 수많은 출판사를 제치고 작가의 원고를 받아낸 뒷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출판사 대표의 재담과 에너지, 유머와 따뜻한 정에 완전히 매료됐던 자리였습니다.

 

새해 첫 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

 

여기까지 인연만으로도 블로그 쓰기엔 부족함이 없다 생각했데, 글 올린지 하루 지난 오늘(8일) 급기야 김승섭 교수가 인터뷰차 회사를 방문했습니다. 사진은 제가 찍었고요. 부족한 2%가 채워지는 느낌입니다.       

 

  +김승섭 교수가 최근 <말이 칼이 될 때>를 출간한 홍성수 교수와 이야기하는 중에 한 컷.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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