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사진기자들이 울었다

나이스가이V 2018. 3. 23. 12:21

지난 블로그에 이어 평창패럴림픽 동안 짧게 메모했던 단상을 옮겼습니다. 폐막한 지 닷새가 지났지만 여운이 여전합니다.

 

311파이팅을 외치다.

크로스컨트리. 설상의 육상이다. 한국 신의현이 메달을 딸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사진이 될 것 같은 포인트를 옮겨가며 앵글을 잡았다. 전날 허둥댔던 바이애슬론 취재가 도움이 됐다. 북한의 마유철과 김정현도 첫 경기를 펼쳤다. 북한은 처음으로 동계패럴림픽에 나왔다. 경사로를 오르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마유철과 김정현이 카메라 앞을 지나갈 때 동료들이 너나없이 외쳤다. “마유철 파이팅.” “김정현 힘내라.” 현장에서 경기를 펼치는 선수들을 향해 소리 내 응원한 적이 있었던가. 두 선수는 나란히 최하위를 기록했다. 같은 경기에서 신의현은 동메달을 따냈다. 대한민국 첫 메달 신고였다.

 

 

 

 

312일 메달은 중요하다

메달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장애를 극복한 승리자다.” 흔한 말이다. 이번 대회에서도 누군가의 인사말에 약간 변형이 있을지언정 예외 없이 구사되는 문장이다. 이 문장에 태클이 걸고 싶어졌다. 선수들에게 메달은 중요하다. 현실은 장애인에게 더 가혹하지 않나. 연금이나 포상금이 절실한 선수들이 많지 않았을까. 이번 패럴림픽에서 장애인 선수에게 흔히들 붙이는 상투적인 미사여구가 어쩌면 비장애인의 시선만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313일 버터링쿠키와 아메리카노

평창과 정선, 강릉을 오가는 취재를 매일하고 있다. 오전과 오후 각각 한 종목을 보는 것이 취재의 기본이다. 분위기를 탄 한국 아이스하키팀과 금메달 1순위 미국의 경기가 낮 12시에 진행됐다. 어정쩡한 경기 시간에 평창이나 정선에 가서 다른 종목을 볼 수 없었다. 아이스하키 하나 똑바로 보는 것이 최선. 오전 시간이 비었다. 경기 시작 1시간30분전쯤 하키센터에 도착했다. 미디어센터 무료 제공 간식코너에서 버터링쿠키와 아메리카노 한 잔을 자리에 가지고 와서 느긋하게 먹었다. 출장 와서 처음 맛보는 여유다. 여기 쿠키는 유난히 맛있다. 군대에서 먹던 초코파이 같은 느낌이랄까. 훗날 이 쿠키의 맛을 동료기자들과 얘기할 것 같다. ‘모처럼의 여유라는 의미까지 담아서.

 

 

 

314일 선택

평창동계패럴림픽은 아이스하키, 휠체어컬링, 알파인스키, 스노보드, 크로스컨트리, 바이애슬론 등 총6개 종목으로 이뤄졌다. 동계올림픽에 비해 대폭 줄어들었지만 혼자 감당하기엔 부담이다. “무리하지 말고 할 수 있는 것만 하라는 선배의 충고도 현장에선 도움 되지 않는다. 선택 앞에 매순간 갈등이다. 무슨 종목부터 볼까? 오후엔 어느 종목으로 이동할까? 메달 가능성 있다는데 어제 이어 오늘도 봐야하나? 결승선 사진포지션에서 볼까, 산중턱에 갈까? 경기장 1층에서 찍을까, 2층에서 찍을까? 600mm렌즈를 빌릴까, 말까? 찍으며 마감할까, 끝나고 마감할까? 평창을 선택한 뒤엔 정선과 강릉이, 강릉에선 평창과 정선의 사진이 어땠을까를 궁금해 하고, 결승선에서 찍으며 산중턱의 그림이 낫지 않았을까 불안해한다. 경기 하나를 찍으면서도 선택할게 참 많구나.

 

장애인 선수들은 삶 속에서 어떠한 일련의 선택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됐을까

 

 

 

 

315셔터 대신 인사

패럴림픽 선수촌. 북한 선수단이 일정을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다. 평창에는 아침부터 빗방울이 굵었다. 한 시간쯤 기다리자 선수단 20여명이 선수촌에서 나와 버스에 올랐다. 사진기자들의 셔터소리가 요란하다. 버스에 앉은 선수들의 모습을 담으려했지만 까맣게 코팅된 차창 안은 보이지 않았다. 열려있는 버스 출입문 가까이에 앉은 정현 북한 선수단장이 보였다. 그가 활짝 웃었다. 사진기자들의 플래시가 터지자 그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마땅히 그 모습을 카메라로 바라보았어야 했던 내가 따라서 꾸벅 인사를 했다. ‘이건 뭔가?’ 결정적 장면은 아닐지라도 앵글 속 피사체의 행동에 셔터를 누르는 대신 왜 인사를 받았을까. 종종 나를 이해 못 할 때가 있다. ^^ 

 

 

 

②주요 뉴스

매체들이 지금 가장 큰 뉴스로 다루고 있는 ‘MB’미투소식이 내겐 멀고 낯설고 사소하다. 출장지에서는 내 출장의 목적이 가장 큰 뉴스가 된다. 내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바라보는 뉴스보다 중요한 뉴스는 없다. 패럴림픽에 와서 바이애슬론센터, 알파인 스키장, 하키센터, 컬링센터, 선수촌만큼 중요한 출입처도 없고, 여기서 찍어내는 사진 이상으로 내게 중요한 사진이 없다. ‘바로, 지금, 여기, 내가바라보고 빠져들어 있는 뉴스가 가장 크다는 생각이다. 평창패럴림픽이 크게 다뤄지지 않고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은 그만큼 패럴림픽에 집중하고 빠져들어 있기 때문이겠지.

 

 

 

 

316일 풍경이 되어

동료들이 두세 번쯤 바이애슬론과 크로스컨트리 사진을 찍으며 자신이 생긴 모양이다. 어디서 어떻게 찍을지 우왕좌왕하며 안전빵으로 사진기자 많은 곳에 뭉쳐있었던 것이 불과 사나흘 전이다. 동료기자들이 보이질 않는다.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건 나름 자기의 앵글을 구사하려하고 있다는 것. 나 역시 좀 다른 그림을 찾아 경기 코스를 걸었다. 지난 이틀 포근해 나무와 바닥을 드러냈던 숲이 다시 내린 눈에 하얗게 덮였다. 설원을 배경으로 달리는 선수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자신과 고독한 싸움을 벌이며 눈밭을 가르는 장애인노르딕스키 선수들. 그들이 살아온 삶을 함축하고 있다고 느꼈다. 희디흰 설경 속에 하나의 풍경이 되어 달리고 넘어지고 일어나고 또 달리고 있었다.

 

 

 

 

3월17일 점쟁이가 아닌 것을...

몸은 쉬는 날을 기억한다. 토요일 일하려니 평소보다 피로감이 더 밀려온다. 휠체어컬링 3,4위전과 아이스하키 3,4위전이 있는 날. 두 개의 동메달을 기대되는 날이었다. 메달이 나오는 경기를 놓칠 순 없다. 휠체어컬링의 메달이 아쉽게 좌절되고 바로 하키센터로 이동. 대한민국 아이스하키 대표팀은 이탈리아를 상대로 마지막 피리어드에 극적인 골을 넣었다. 동메달이 눈앞에 있었다. 잠시 후 장내 아나운서가 노르딕스키 신의현의 금메달 소식을 전했다. 관중들이 환호했고 사진기자들은 서로 바라보며 허탈해했다. 경기 시간이 겹쳤고 메달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 휠체어컬링과 아이스하키를 선택했던 전날 밤, 누군가 지나가듯 웃으며 말했다. “신의현 금메달 따는 거 아냐?” 대한민국 동계패럴림픽 사상 첫 금메달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나는 담지 못했다. 어쩌겠나, 점쟁이가 아닌 것을.

 

 

 

 

 

3월18일 사진기자들이 울었다

수시로 코끝이 찡해지고 눈자위가 시큰해지는 게 나이 탓이려니 했다. 장애를 가진 선수들의 도전이 매 순간 눈물을 불렀다. 감동의 눈물이었다. 나만 그런가 싶어 둘러보면 옆에 있는 후배들도 훌쩍거렸다. 대회를 냉정하게 기록해야할 기자들이 울었다. 가장 가까이서 현장을 지켜봐서일 것이다. 그 감동이 내가 찍은 사진에 온전하게 담겼을까.

열흘 동안 열렸던 장애인 선수들의 겨울 스포츠 축제는 끝났다. 장애와 장애인, 장애인 스포츠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한층 커졌으리라 믿는다.

패럴림픽을 찍으며 참 행복했다. 봄이 오고 있다.

 

 

 +저와 함께 패럴림픽을 기록했던 동료 사진기자들이 경기를 마친 이도연 선수에게 "수고하셨다. 멋있었다" 인사를 건네고 있는 모습입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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