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풍경

연기 경연장 된 청문회

나이스가이V 2016. 12. 12. 07:30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누렸던 권세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해줍니다. 지난 6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국정농단 국정조사 청문회에 재벌 총수 9명이 한꺼번에 출석했지요. 국회에서 여태껏 볼 수 없었던 취재진의 규모였습니다. 대통령이 국회에 와도 이날 규모의 반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취재진의 규모로 권력의 크기를 가늠한다면 대통령 위에 재벌이 있는 것이지요. 이런 재벌들을 대거 출석시켰으니 최씨의 권력이 대통령 위에 있다 할 수 있겠지요. 

 

 

 

 

의원들은 대기업 총수들에게 최순실의 미르·K스포츠재단에 대한 출연금의 대가성 등을 따져 물었습니다. 수없이 지켜본 청문회의 학습효과겠지만 재벌 총수들의 답변은 잘 모른다” “보고 받지 못했다” “송구하다등의 발뺌과 변명의 말이 대부분이었지요. 특히 이날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질문이 집중되었습니다. 재단 출연금 이외에도 정유라 승마 특혜지원과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에 대한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회장은 느릿한 중저음의 목소리에 긴장과 지극한 공손함을 담아 시종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준비된 문장인 듯 질문이 달라져도 답은 같았습니다. 의원과 기자들 사이에서 실소가 터졌습니다. 내용 없는 답변에도 수준(?)은 있는지라 좀 의아했지요. 오랜 대책회의와 예행연습도 했을 텐데 말이지요. 준비한 답변에 대한 강박때문인지, 앞선 답변이 스스로 민망해 곱씹고 있었던 것인지 의원들의 질문을 못 알아듣기도 했습니다.

 

 

청문회가 정회될 때마다 기자실로 모여든 동료들 사이에 이 부회장의 모습이 단연 화제가 되었습니다. “삼성전자 주식 있으면 빨리 팔아라” “저 정도 밖에 안 되나” “민망하네같은 반응들 사이에서 누군가 확신에 찬 말로 저거 연기하는 거다. 바보 연기. 삼성이 어떤 조직인데...”라더군요.

 

우리가 청문회장에서 본 이재용 부회장의 긴장하고 공손하고 어눌한 말과 고개 숙인 모습 등이 치밀한 계산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매뉴얼에 의한 연기였다면, 생각만으로도 참 무섭습니다. 일단 그런 의심을 갖고 보니 청문회 자체가 '연기'로 보입니다. 다른 대기업 총수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의원들에 대한 경외의 표정과 저자세, 적당한 긴장과 어리숙한 답변 등 연기 경연장이었던 셈이지요. 예행연습으로 익힌 이런 답변에 의원들의 질문 의지를 꺾고 국민들에겐 일말의 동정을 끌어내는 효과도 계산됐을까 궁금했습니다. 단 하루의 망신과 치욕의 비용을 감내하면 오랫동안 다리 뻗고 지내지 않겠나 생각했겠지요.

 

 

국회의원이라고 이 경연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미 언론보도된 것을 묻고, 같은 답으로 돌아오는 소득 없는 질문을 반복했습니다. 정곡을 찌르지 못하는 질문은 호통과 윽박으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지켜보는 국민들의 '카타르시스'를 염두에 둔 것이라면 그 또한 연극적입니다. ‘청문회 스타라는 정치적 타이틀을 의식했을까요.

 

이날 청문회의 마지막 장면은 의원들과 재벌 총수들이 서로 수고하셨다며 밝는 표정으로 인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날 하루 종일 기자들이 찍은 사진 중 가장 진실에 가까운 사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이날 연기 경연의 우승자는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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