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유리멘탈

나이스가이V 2016. 6. 20. 08:35

사진은 기다림의 미학이라고들 합니다만, 그 기다림이 미()의 가치를 보장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다림 자체도 그리 우아한 일이 못 되지요. 그래서 기자들은 막연한 기다림을 뻗치기라 다소 가볍게 부르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17일 새누리당 김희옥 혁신비대위원장이 당무를 거부하고 칩거에 들어갔습니다. 유승민 의원 등 탈당파의 일괄복당 결정 과정에 불쾌감을 드러낸 것이지요. 아침부터 김 위원장의 논현동 자택 앞에서 뻗치기에 들어갔습니다.

 

출입구부터 경비가 철저한 아파트 앞에서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찍을 수 있는 많은 일들을 두고 찍지 못할 수도 있는 일에 매달리는 것은 그것이 주요 뉴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경쟁사의 기자들이 기다린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뻗치기에 차출된 기자들은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함께 해야 할 운명이므로 이런저런 사소한 얘기부터 제법 묵직한 얘기들까지 풀어가며 시간을 보냅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두 시간이지 오전이 다 지나갈 무렵 설마 오늘 얼굴 보이겠니?” “계속 기다릴 필요 있을까?”하는 말들이 오갑니다. 날은 덥고 몸은 쉽게 지치지요.

 

 

 

저는 그렇게 6시간을 꼬박 기다리다 오후 5시 예정된 국회의장과 3당 원내대표 첫 회동 일정을 챙기기 위해 국회로 향했습니다. 국회의장실 앞 복도를 가득 메운 기자들 틈에 끼는데 한 선배가 김희옥 위원장 찍고 오냐?”고 물었습니다. “?” “다 찍었다는데.” 국회로 달려오는 동안 김 위원장이 집 앞에서 타고 있던 차량에서 친절하게 내려 인터뷰까지 하고 들어갔다는 것이지요. ‘~! 15분만 더 기다렸어도...’

 

자리를 차지하고 바닥에 앉으면서 갑자기 짜증이 솟았습니다. 더위에 몸을 익혀가며 기다렸던 내 인생의 6시간이 그제야 구체적으로 다가왔던 겁니다. “ㅅㅂ...” 혼자 뱉은 욕의 볼륨이 컸던지 옆에 있던 타사 취재기자가 움찔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일들은 인생다반사 아니겠습니까. 누군가가 유사한 일을 겪었다면 그럴 수도 있지” “원래 그런 거야. 괜찮아.”하고 어깨라도 토닥였을 테지만 그게 나의 일이 되는 순간에는 재수 없는 하루 운세를 탓하며 화가 치미는 것이지요.

 

집에 들어와 하루를 돌아보니 한심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유리멘탈이 그렇게 못나 보이데요. 수행이 필요하다 싶었습니다. '기다림' 끝에 아름다움대신 추함을 드러낸 날이었지요.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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