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나는 사기꾼이었다

나이스가이V 2016. 10. 21. 11:02

저는 사기꾼이었습니다. 좀 억울했지만 입장을 바꿔보니 영락없는 사기꾼이었지요. 두 주일 전에 사진다큐를 위해 찾은 한 농촌에서의 일입니다.

 

며칠 계속된 비에 땅이 질어 가을걷이에 나선 농민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무작정 헤매다 콤바인 작업에 나선 노부부를 만났습니다. 이번 다큐의 핵심 주제인 쌀값에 대한 얘기도 듣고 사진도 찍을 요량으로 다가갔습니다. 서글서글한 인상이 참 좋았습니다. 틈틈이 던지는 물음에 답도 잘 해주셨지요. 내내 농사일을 지켜보며 가끔 사진 찍고 가끔 질문을 했습니다. 모르는 쌀농사는 지켜보는 거 이상 답이 없었지요. 시간을 충분히 두고 대화하다가 자연스레 집으로 초대받는 모양새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더 깊이 다가가 노부부의 사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마감에 쫓긴 성급한 저만의 생각이었습니다. 어르신은 들녘의 일이 끝나가도록 붙어있는 제게 더 찍을 게 남았나.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았나고 하셨지요. ‘땡볕에 고생이네하는 촌로의 인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입가에 미소를 유지하신 채 어르신은 무슨 취재로 왔다고 했지하고 새삼 물었습니다. 이날 아침에 만나자마자 취지를 설명했었지요. 어르신은 좀 머쓱해하며 지나가듯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긴 시간 뭐 별로 하는 것도 없이 옆에 붙어 버티고 있으니 의심이 일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불편해진 겁니다. 사실 전날도 비슷한 일을 겪어 이 순간 좀 더 진심을 보이자 마음 단단히 먹었더랬습니다. 전개되는 상황을 반전시켜 보려 볏단을 몇 번 들어 옮겼습니다. “하지 말라하시데요. 이미 고개 든 의심이 저의 행동 하나하나가 환심을 사려는 수작으로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어떠한 친절도, 짓고 있는 선한 표정도 경계를 키우는 요소일 뿐이었지요.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노트북 가방에서 신분증을 꺼내와 보여드렸더니 뒷면에 직인이 왜 없냐고 물었습니다. 어르신의 저를 향한 심증은 굳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신문사 이름이 크게 새겨진 취재차량이 저하고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수상했던 모양입니다. “저 차 운전하는 양반도 회사서 월급 받나?” 명함도 신분증도 취재차량도 이미 의심 속에서는 완벽한 사기를 위해 철저히 준비된 소품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어르신은 미안했던지 경찰서에 가서 신분을 증명 받은 뒤에 취재하는 게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 순간에 그 앞에서 저 스스로를 경향신문 기자라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어르신의 걱정과 불안만 키우겠다는 생각에 결국 건강하시라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르신은 물러나는 저를 보고 안도했을지 모릅니다. 이날 오전에 명함을 건넸을 때 저도 모르는 전남지역 경향신문 박oo 기자를 잘 아신다며 물어보면 알겠구먼하셨지요. 그런 사람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게 예의가 아니다 싶어 ......”하고 얼버무렸었지요. 그 박oo기자가 사기를 쳤을 수도, 아니면 어르신이 잘못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대뜸 그 기자에게 전화해 제 이름을 댄다면 당연히 모른다 할 테고, 그러면 어르신의 의심은 확신이 될 테지요. 가슴을 쓸어내리는 어르신의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디서 기자라 사칭하는 것이 가장 수월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약장사라 하고 약 파는 사람은 없겠지요. 농촌 현실에 대한 이해도 없이 기사를 써대는 것도 어쩌면 사기일지 모르겠습니다.

 

다큐기사를 보셨다면 오해를 푸셨을 테지만 못 보셨다면 저는 여전히 사기꾼의 한 유형으로 어르신의 기억에 남아있겠군요.


스스로 기자라고 증명할 수 없다는 것과 내가 기자가 맞긴 한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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