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총 그리고 힐링

나이스가이V 2018. 4. 2. 07:30

살벌하지만 ‘총 맞았다는 표현을 종종 씁니다. 예정 없던 일을 떠안게 되거나, 막 일어난 '쎈' 사건·사고 지역에 갑자기 출장을 가게 되는 경우 그리들 말합니다. 

 

지난 28일 강원 고성에 산불이 났고, 상황을 지켜보던 부장이 외부에 있던 선배에게 출장지시를(총을) 내렸습니다(쏘았습니다). 뒷날 봄 스케치 출장 일정을 잡아놓은 저는 총을 피했습니다. “불났는데 꽃 사진은 좀...” 후배는 산불이 주말까지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산불 출장을 자원했습니다. 총부리를 제게로 돌린 것이지요.

 

불을 어떻게 찍어야 하나, 드론을 띄울 수 있나, 마스크는 몇 개쯤 써야할까, 서너 개 챙겨 온 미세먼지 마스크가 효과가 있을까, 신고 간 등산화는 열에 버틸까.

 

고성에 도착하니 큰불이 거의 잡혔다고 했습니다. 불이 더 번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사진이나 찍고 난 뒤에 꺼질 것이지하는 못된 생각이 빼꼼이 고개 들었습니다. 바람이 센 곳이라 조그만 불씨도 다시 살아날 수 있어 밤 상황을 대비했습니다.

 

 

 

바람은 밤새 숨을 죽였습니다. 아침부터 육군 장병들이 까맣게 그을린 야산에서 혹시 모를 잔불을 찾아 흙을 뒤집었습니다. 불 찍으러 왔는데 불이 없어 불자국을 찍었습니다. 불의 불씨가 잦아든 그때 포기했던 봄 스케치의 불씨가 살아났지요. 남도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남한땅 북동쪽 끝에서 가장 먼 전남으로 향했습니다.  

 

한 달 전 매화가 피기도 전에 찾아갔다가 당황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광양 매화마을을 찾았습니다. 만개한 매화를 규모 있게 찍고 싶었지요. 다시 당황했습니다. 매화는 절정을 지나 꽃을 떨구고 있었지요. '열흘이면 지고 마는 허망한 꽃'에 이리 집착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요.   

 

오로지 매화를 생각하고 달려왔던 그길 옆에 흐드러졌던 벚꽃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습니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광양과 하동에 벚꽃이 경쟁하듯 하얀 띠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다음날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에 절정을 이룬 벚꽃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일인지라 봄의 정취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애초에 틀려먹은 것이지만, 그래도 예전에 비해 마음에 공간이 조금 생겼는지 좋네. 좋아를 연발했습니다.

 

 

 

불이 지나간 자리의 새까만 것에서 봄이 오는 길목의 새하얀 것으로 시야가 채워지고, 코끝에 맺힌 듯 남았던 재냄새를 벚꽃향이 밀어냈지요. 까망과 하양, 탄내와 꽃향, 죽음과 생명의 강한 대비가 출장을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총' 맞아 시작한 일이었지요. 결국 '힐링'으로 끝이 난 것 아니겠습니까. ^^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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