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과 행운
취재했던 사진 원본 파일을 다시 들여다볼 때가 있습니다. 가끔의 필요를 대비해 마감한 사진 이외의 사진 파일들을 바로 삭제하지는 않습니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쓸모의 가능성이 거의 사라지고, 메모리카드의 공간이 부족해질 때 오래된 취재사진부터 삭제를 해갑니다. 파일 전량을 보관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그 방대한 양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진 에세이를 쓸 목적으로 원본사진이 든 메모리카드를 다시 열었습니다. 비슷비슷한 한 뭉텅이씩의 사진을 조금 더 꼼꼼하게 보게 됩니다. 현장마감처럼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여유 때문이겠지요. 다시 보이는 사진이 있습니다. 당시 골라내진 않았지만 더 선명하게 찍히거나 좋아 보이는 앵글의 사진이 있고, 찍으려 했던 의도에 더 어울려 보이는 사진도 뒤늦게 눈에 띕니다. 한번 봤던 사진인데도 그렇습니다.
사진을 골라내는 순간의 여러 상황과 조건들이 이런 '변덕'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마감의 압박 뿐 아니라 눈과 몸의 피로도 같은 조건들, 그날의 감정과 날씨까지 사진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좁히는 것에 관여하는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최상의 상황이 반드시 좋은 시야와 시선을 열어준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오히려 좋지 않은 조건들이 좋은 시야와 깊은 시선을 갖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찌 됐든 매번 원본 파일을 열 때마다 채택되는 사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새기게 됩니다. 그런 사진 몇 장 찾아 올리려다 말이 길어졌네요.
세계 습지의 날(2월 2일)을 앞두고 순천만 습지를 찾았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운 오후 4시 무렵 습지생태공원 내 용산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이곳은 저물녘 간조 때 드러나는 'S자' 물길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S자 물길 위에 떨어지는 낙조의 변화가 자체로도 경이로웠지만, 사진에는 조금 더 생동감이 필요했습니다.
이 좋은 풍광 안으로 순천만의 '유명' 철새 흑두루미의 무리를 넣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낙조와 철새의 이동은 시차가 있었지요. 빛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사진을 찍을 수 있고, 흑두루미들은 해가 넘어가야 잠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장비를 아주 잘 갖춘 한 사진작가가 옆에 서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8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허탕을 친 적이 많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그냥 묵묵히 기다릴 일을 내려갈까 말까 갈등하며 기다리게 만들었습니다.
해가 거의 넘어가 어둑해졌고, 눈 보다 귀가 밝아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인근 농경지에서 들려오던 흑두루미 무리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일부 무리가 서둘러 갯벌과 갈대 군락으로 돌아오고 있었지요. 카메라의 감도(빛의 양이 부족한 곳에서 빛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수치)를 한껏 높이고, 실눈을 뜬 채 앵글 속 어둠에서 희미한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촤르륵촤르르륵” 셔터 소리가 철새들의 재잘거림 속으로 날았습니다.
어느 선배는 종종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완성된 사진(이 곧 좋은 사진은 아니라는 게 지금 제 생각이지만)은 사진가 혹은 사진기자의 인위적인 연출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소신이었지요. ‘정자는 가져다 놓을 수 있는 거야'라는 의미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연이 압도하는 곳에서 인간은 그저 무기력한 객일 뿐이지요. 철새들을 부를 수 없으니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수밖에요. '물 좋고, 갯벌 좋고, 갈대 좋은 곳'에서 인위는 오직 기다림!
그나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건 흑두루미들이 조금 일찍 날아오는 ‘행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yoonjo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