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 106

문 앞에서

'바로 저 문이었구나' 눈앞의 문은 앞서 출장을 경험했던 동료들이 얘기했던 바로 그 문이었습니다. 굳게 닫힌 문 앞에는 기자들이 바짝 붙어 섰습니다. 들었던 말에 의하면 선한 얼굴을 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미국 기자들에게 속아선 안 됩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 띤 표정으로 인사를 합니다만 딱 고만큼만 받아서 웃어주되,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닫힌 문 너머에는 한미 양국의 정상들과 참모들이 회담을 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기자들이 먼저 자리를 잡지만, 이곳에서는 회의 중에 잠깐 문이 열리고 기자들이 들어가 취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미 정상회담 출장을 하루 앞두고 한 동료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 전화였지요. 그는 트럼프 시절 문 ..

사진이야기 2021.05.29

터진 봄, 터진 감성

사진기자는 계절을 앞서 감지해야 합니다. 여름이 오기 전에 시원한 물놀이를, 가을이 아직 저만치 있는데 물든 단풍을, 겨울이 미처 닿기도 전에 움츠린 출근길 시민들을 사진에 담습니다. 이것도 업자들 사이에 경쟁이 되다보니 어색하고 설익은 사진으로 억지를 부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지요. 뭐, 저라고 자유롭겠습니까. 추위가 예년만 못했다고는 하나, 겨울이 지나지 않았는데 다가온 봄을 사진다큐에 담고 싶었습니다. 설 이후 남도의 한 수목원에 연락했습니다. 몇몇 꽃나무에는 꽃망울이 올라왔다고 알려줬습니다. 꽃눈을 ‘잘’ 찍어보기로 했습니다. '출장을 언제가나' 타이밍을 잡고 있는 동안에도 제주와 일부 지역에서 서둘러 핀 꽃사진이 지면에 실리기도 했지요. 조바심이 약간 생겼지만 꿋꿋하게 꽃눈에 집착했습니다. 흔히 관..

사진다큐 2019.02.25

머물러 있는 사진

몇 달 전 어느 술자리에서 좋아하는 후배 사진기자가 술기운(?)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형님 사진은 늘 그대로에요.” “이 새끼 주글래?” 웃음 띤 채 말하기에 장난처럼 받았지요. 늦은 밤 “형님, 죄송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받고, 그저 웃자고 했던 말이 아니었음을 아프게 깨달았습니다. 친하니 조금 불편하더라도 평소 느낌을 말한 것일 테지요. 며칠 전엔 한 친구가 제 사진에는 저만의 색이 있다고 하더군요. ‘너다운 사진’ ‘너니까 찍는 사진’ 같은 평가도 덧붙었습니다. 과찬이지요. ‘내 사진에 정말 그런 게 있기는 할까’ 고마웠고 한편 부끄러웠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칭찬과 돌직구가 엉켰습니다. 익숙한 시선과 몸에 새겨진 버릇이 비슷한 느낌의 사진을 반복적으로 찍어댔겠지요. 고민하는 척(그거라도 해야 할..

사진이야기 2018.07.31

월드컵 최고의 장면

서랍 속 외장하드를 꺼냈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꺼낸 게 아니라 꺼낸 다음 목적을 찾았습니다. ‘2010년’ 폴더를 열었습니다. 거기엔 ‘2010남아공월드컵’이라는 하위 폴더가 들었습니다. 그때 사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사진을 넘겨보는 동안 당시 기억들이 불려나옵니다. 사진을 찍던 훈련장, 경기장, 도시와 이동하던 거리 등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 주변의 풍광들이 생각보다 또렷하게 그려졌습니다. 8년 전으로의 여행이었지요. 한 장의 사진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사진은 8년 전의 시간에서 다시 지금의 자리로 돌려 놓았습니다. 재밌는 사진이었습니다. 8년 이라는 시간의 결코 짧지만은 않은 세월임을 느끼게 했습니다. 찍을 당시에는 그저 밋밋한 훈련사진이었는데 말이지요. 사진설명에는 "한국 월드컵 대표팀이..

사진이야기 2018.06.22

'1억 배우'보다 빛나는 '사진기자'

‘누적관객 1억 배우’라는 수식어가 익숙한 ‘배우 오달수’의 인터뷰 사진을 찍었습니다. 영화 의 개봉을 앞두고 진행된 ‘라운드인터뷰’였습니다. 라운드인터뷰는 4~5개 매체를 묶어서 동시에 진행하는 집단인터븁니다. 인터뷰하려는 매체가 무지 많기 때문이지요. 대게 1시간쯤 진행되는 인터뷰에 앞서 4~5개 매체의 사진기자들도 무리지어 사진을 찍습니다. 10분쯤 시간이 주어집니다. 각기 조금씩 다른 위치에 선 기자의 카메라를 향해 배우가 시선을 골고루 주는 식이지요. 저같은 경우 대체로 시간에 쫓기며 말없이 찍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관계가 지워지고 셔터소리만 가득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그저 카메라가 되어버렸구나'하는 자괴감도 살짝 들지요. 제 나름의 요구와 표현으로 다시말해 '1대1'로 ..

사진이야기 2018.02.05

'2017년, 난 누굴 만났나'

2017년이 가고 있습니다. ‘올해의 뉴스’와 ‘올해의 사진’ 등 내·외신 매체들이 한해를 정리하는 뉴스를 내놓고 있지요. ‘나는 올해 무슨 사진을 찍었나?’ 싶어 개인 외장하드를 한 번 훑었습니다. 매년 12월 요맘때면 하는 연례행사지요. 올해 만났던 사람이 눈길을 붙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았습니다만 마음가는대로 즉흥적으로 골랐습니다. 1월, 경향신문은 ‘대선의 꿈’이라는 신년 기획으로 대선주자 신년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를 ‘단독’ 촬영했습니다. 인터뷰 장소였던 한 호텔 앞 인도에서 “5년 전 대선에서 제가 마크맨이었습니다”라고 인연을 앞세우며 “걸어오시겠습니까?” “카메라 보시면서 미소 지어주시겠습니까?”라고 했었지요. 조기대선 이후 ..

사진이야기 2017.12.21

낯설게 카메라를 본다

김선우 시인이 쓴 책 ‘김선우의 사물들’(단비)을 읽다가 19번째 사물 ‘사진기’에 대한 글에 유독, 아니 당연히 관심이 쏠렸습니다. 시인의 눈에 사진기란 어떤 것일까. 굳이 ‘사진기’라고 쓴 것은 ‘카메라’라고 했을 때 떠올려지는 다양한 기계를 배제한 채 아날로그적 감성 유지를 위함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탁자 위에 올려둔 사진기 렌즈와 무심하게 눈이 부딪혔나 보다. 커다랗고 둥근 눈, 맑고 깊지만 심중을 헤아릴 수 없는 건조한 광택을 지닌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그는 좀체 자신의 표정과 체온을 들키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내 손 안에서 외부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던지던 사진기는 손에서 놓여나 탁자 위에 섬처럼 앉은 순간 자신의 내부를 향해 오래도록 면벽한 자의 얼굴로 돌변한다. 그는 손안에서..

사진이야기 2017.09.06

100만의 인연

엊그제 블로그 방문자가 100만을 넘어섰습니다. 숫자의 노예가 된 시대를 살면서 숫자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노력이 좀 더 사람다운 삶을 보장한다고 생각합니다만, 블로그에 표시된 ‘1000000’이라는 숫자는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아래 하루 방문자 수가 1000 단위가 넘어가는 것은 앞에 올린 문재인 대통령 관련 글 덕입니다. 평소 100~200 정도인데 '대통령 특수'를 누리고 있지요. ^^ 지난 2004년 5월31일 남산타워에 올라 찍은 파란 하늘 사진과 함께 ‘사진기자라서...’라는 첫 글을 올렸습니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사진기자로 나름의 고민도 긁적였고 남기고 싶은 기억도 새겼습니다. +생애 첫 블로그 글 블로그는 일단 ‘가볍고 재밌어야 한다’며 시작했는데 힘이 들어가고 다소 무거워지고 있..

사진이야기 2017.05.24

카메라를 내려놓을 용기

시리아발 사진 한 장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사진기자 때문에 그 메시지가 더 부각되었지요. 주인공은 시리아 한 매체의 사진기자 압둘 카디르 하바크입니다. 시리아 알레포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현장에서 오른손에 카메라를 손에 쥔 채로 부상당한 아이를 안고 달려 나오는 사진이었습니다. 일상적인 것이 그러하듯 시리아 테러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특히 한국 언론의 관심에서는 더 멀지요. 그런 중에 현장의 위험을 무릅 쓴 사진기자의 정의로운 행동이 기록된 사진이 널리 공유되고 찬사를 받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아의 참상이 이 피사체인 사진기자 덕에 드러나고 관심의 영역으로 잠시 들어왔습니다. 만약 구조대원이 아이를 안고 뛰어나왔다면 역시 일상성의 범주 안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씁쓸한 짐작도 해..

사진이야기 2017.04.24

달콤 씁쓸한 탄핵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파면됐습니다. 지난 10일 헌법재판소가 만장일치로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을 인용했습니다. 이 역사적인 날, 저는 헌재 인근 안국동 거리에서 선고 생방송을 지켜보는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 서 있었습니다.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의 목소리가 무대 위에 설치된 화면에서 흘러나왔지만 잘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휴대폰을 통해 방송을 지켜보는 세월호 가족과 주위에 모인 시민들의 표정으로 선고 상황을 짐작했습니다. 처음 얼마간 환호로 시작한 선고가 탄식과 함께 무겁게 변해갔습니다.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세월호 관련 선고 내용이 간간이 들려왔고 유가족들은 얼굴을 묻었습니다. 기각인가? 이어지는 선고 결정문에서는 문장마다 환호가 터졌습니다. 그 속에서 비교적 또렷하게 이 재판관의 목소리가 들려왔습..

사진이야기 2017.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