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겨울철에 큰 산불이 나면 봄기운이 찾아들 무렵 다시 산불현장으로 갑니다. 식목일을 앞두고 있다면 더 좋은 취재타이밍입니다. 상처가 여전한 현장을 돌면서 불 탄 자리에 자라난 풀이나 꽃을 찍곤합니다. 보통 '생명' '회복' '기대' 따위의 단어를 동원해 희망의 메시지를 욱여넣은 사진설명을 쓰지요. 산불 한 달만에 다시 찾아간 울진에서도 역시 검게 탄 야산에 핀 꽃을 찍었습니다. 다 타서 죽고 쓰러지고 베어질 숲에서 작은 꽃하나 찍었다고 희망을 말할 순 없었지요. 전형적인 사진과 설명을 극복하는 일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금주의 B컷]
지난 4월3일 경북 울진군을 찾았다. 213시간이라는 역대 최장 기록을 세운 동해안 산불이 발생한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북면 일대의 처참한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도화동산에는 드문드문 초록의 풀들이 아침햇살에 반짝였다. 민가의 피해가 컸던 신화2리에는 “함께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집이 타버려 임시주택에서 거주하는 한 할머니는 재너머 밭에서 봄냉이를 캐고 콩을 심었다.
하당리의 한 야산은 길을 따라 좌우로 빈틈 없이 그을렸다. 까만 숲에서 작은 노랑제비꽃이 유독 눈에 띄었다. 뿌리가 타지 않은 생명이 거친 땅을 뚫고 나와 봄을 맞았다. 북면의 도로를 따라 봄의 전령인 산수유, 매화, 개나리가 여느 때처럼 피었다.
포근해진 골바람에는 옅은 탄내가 실려다녔다. 산불 한 달, 울진에는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사상 최대라는 화마가 할퀸 검은 상처를 감싸진 못했다. /ㅇ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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