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디에 있어요? 박행란 동지(활동가들 사이에는 '동지'라는 호칭을 쓴다)가 강기자가 우산도 없이 어디 갔는지 안 보인다며 전화를 했어요. 연락처도 없다면서.” 김경봉 꿀잠 활동가의 전화를 받았다. 버스에 막 오른 참이었다.
이날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을 지키려는 이들의 릴레이 1인 시위가 진행됐다. 꿀잠을 취재 중이던 나는 1인 시위를 지원하기 위해 나선 박행란 꿀잠 활동가와 함께 영등포구청으로 향했다. 박 활동가의 가방에 삐죽하게 고개 내민 우산 하나가 보였다. 흐렸지만 비가 올 것 같진 않았다. 출근하면 챙겨온 우산을 들고 나설 겨를이 없었다.
1인 시위가 시작되고 곧 비가 내렸고 우산을 챙겨갔던 박 활동가가 피켓을 든 시위자 머리 위로 우산을 받쳐주었다. 빗발이 굵어졌다. 나는 인근 은행 입구에 있는 현금입출금기 앞에서 비를 피했다. 같이 왔으므로 1시간 가량 예정된 시위가 끝나면 박 활동가와 시위참여자와 함께 꿀잠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문득, 우산은 하나고 써야할 사람은 셋이라는 걸 깨달았다. 시위 종료 5분 전, 비가 가늘어져서 버스로 달려갔다. 나 때문에 우산 하나를 두고 난처해할 상황을 안 만드는 게 좋겠다 생각했다. 비가 오기 전, 박 활동가는 사진 몇 컷을 찍고 벤치에 앉아있는 나를 향해 “먼저 들어가세요”라고 했고, 난 “괜찮습니다”라고 했지만, 안 보이면 갔으려니 하겠지 했던 것이다.
버스 안에서 받은 김경봉 활동가의 전화에 이 상황을 다 설명할 순 없었다. 시위가 끝나고 나를 찾았다니 미안하면서도 한편 고마웠다. 비는 계속 오는데 내게 우산이 없다는 것이 걸렸을 것이었다. 김 활동가는 우산을 가지고 나오겠다며 버스에서 내릴 때 전화를 달라고 했다. 버스 정류장에 내리는데 비가 더 거칠어졌다. 적당히 맞을 성질의 비가 아니었다. 전화를 했다. 김 활동가는 “잠깐만 기다려요”라는 말이 전부였다. 꿀잠에서 버스정류장까지 거리를 가늠해보니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머릿속으로 계산했던 시간의 절반도 안 되는 시간에 우산을 받쳐들고 여분의 우산 하나를 챙겨든 김 활동가의 모습이 사람들 사이로 보였다. '이렇게나 빨리?' 전화를 끊자마자 뛰듯이 왔을 시간이었다. 그 모습을 그려졌다. 누군가를 위해 달려와주는 마음이 참 고마웠다. 취재를 하는 기자일지라도 환대를 하는 마음이 참 귀했다. 굳이 안 해도 그만인 일이며, 내가 원망할 일도 아닌 것이다. 이런 환대의 마음이 삶 속에 생기와 무늬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일자리에서 해고와 차별의 고통과 상처라는 비를 맞는 이들에게 김경봉, 박행란 활동가가 일하는 꿀잠은, 넉넉한 우산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리라. 2022.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