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향수 DNA'

나이스가이V 2018. 2. 19. 07:30

지난 추석에 이어 설을 앞두고 5일장 취재차 다시 전남 신안군을 찾았습니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 동일한 장소에 간다는 게 살짝 민망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다시 가야했던 이유가 여럿입니다. 장이 열리는 날이 출장일정과 맞았고, 지난해 B컷(쓰지 못한 사진)이 되고 말았던 사진에 대한 아쉬움이 좀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잠깐씩 스쳤던 사람들의 따스함이 끌어당겼던 것이지요.

 

장날에 맞춰갔지만 사실 5일장 자체를 찍으러 간 것은 아닙니다. 설 대목장에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뭔가 설 앞둔 설렘고향의 정같은 걸 찍어낼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명절의 설렘과 정을 굳이 멀리까지 가서 찍어야 하나?’ ‘도시에서 나고 자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시골의 정서가 얼마나 가 닿을까?’하는 물음이 없진 않았습니다. ‘억지일까?’ 싶기도 하고 말이지요.

 

 

신안군 지도읍. 버스정류장은 장을 본 어르신들로 붐볐습니다. 음식 재료를 담은 검은 봉지들이 가끔 오는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을 대신해 줄지어 서 있었지요. 이곳은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어르신들은 형제, 친척, 친구, 이웃을 만나 손을 맞잡고 흔들며 반가워했습니다. 주고받는 얘기에 슬쩍 얹히는 우스갯소리를 들으며 지역 정서와 삶의 태도, 마음의 공간을 짐작했습니다. 몇 마디 오가면 반드시 한 차례씩 웃음이 터졌습니다. 매번 타이밍을 놓쳐 사진에 담아내진 못했지만, 함께 터뜨리는 큰 웃음이 보기 좋았습니다. ‘아낌없이웃는, 정말 순수한 웃음이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주변에서 어슬렁거렸더니, “어디로 가는지...어디서 왔는지?”를 살갑게 물어왔습니다. “5일장 사진 찍으러 온 신문사 사진기잡니다...명절 앞두고 고향의 따스함을 담고 싶어 왔습니다...어른신들 사진 한 장 찍겠습니다.” 낯선 억양의 외지인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주셨지요. “쭈글쭈글한 얼굴 찍어 뭐하요? 허허허.” “나 좀 잘 찍어 주소. 하하하.”

 

버스를 따라 탔습니다. 다시 이야기와 웃음이 피어납니다. S자를 그리는 도로를 따라 버스가 기울 때마다 검정 비닐에서는 비릿한 물이 이리저리 흘러 바닥에 그림을 그렸습니다. 버스 회차 지점에 차를 댄 나이 지긋한 버스기사님이 늘 있는 일인 듯 흥얼거리며 슥슥밀대로 닦아냈습니다.

 

다시 출발한 버스. 한 어르신이 버스에 올라 요금통에 500원짜리 두 개를 떨어뜨렸습니다. 나이가 적지 않아 보였지만 버스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65세에는 조금 못 미쳤던 것 같습니다. 이날 함께 버스에 오른 이들 중에 요금 1000원을 낸 사람은 저와 어르신 딱 둘이었습니다. 버스기사와 반갑게 인사하더니 어르신의 '사소한' 이야기가 시작됐습니다.

 

 

읍내 농협 앞에 소주 한잔 하러 가는 길...”이라고 기사를 향해 말했습니다. 주변 두어 사람 정도 들릴 정도 크기의 목소리였습니다. 혼잣말 같기도 했고요. 우리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 고양이가 큰 쥐를 한 마리 잡았는데...” 얘기는 버스가 서고 출발하는 소음에 묻혔다가 들렸다가 했습니다. 날씨 얘기가 이어졌습니다. “날이 많이 풀렸다... 요 앞 물에 물고기가 얼어 죽어서 떴더라... 왜가리 4마리가 뜯어먹고 있는 거 봤다...”

 

꼭 누구 들으라 하는 얘기가 아닌 듯 했습니다. 대답과 호응을 원하지도 않아보였습니다. 어쩌면 초면인 제게 들려주는 얘기 같기도 했습니다. 읍내 장터 앞 정류장으로 돌아올 때까지 어르신의 이야기는 계속됐습니다. 그는 이야기꾼이었습니다. 어르신의 말이 거슬리거나 거북하지 않고 편안했습니다. 주변의 소소하고 가벼운 일상의 경험을 구수하고 재미나게 털어냈습니다. 도시에서 경험하는 일상의 큰말들, 공허한 말들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습니다. 어르신의 작은 말들이 미소 짓게 했습니다.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말이지만요.

 

고향도 아닌 신안에서 고향을 느꼈습니다. 나고 자라서 추억과 그리움이 있는 곳이 사전적 의미의 고향이지만, 나이 들고 우연히 머문 곳에서 마음이 푸근해지고 왠지 위로를 받는 기분이 든다면 그곳 역시 고향이 아니겠나 생각했습니다. 우리 안에 새겨진 향수의 유전자는 그렇게 작동하나 봅니다.

 

이런 느낌과 정서를 사진으로 오롯이 표현할 재주가 없다는 것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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