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이후 가진 포토다큐 회의에서 “한반도 긴장이 완화되는데 DMZ의 생태 어때요?”라 던졌습니다. “그거 좋네. 해봐”라는 즉답이 왔고, 저는 바로 막막해졌습니다. 참 큰 말들이죠. ‘한반도의 긴장완화’와 ‘DMZ 생태’가 어떻게 연결되지? 고민에 빠졌습니다.
“DMZ 생태를 찍겠다”는 건 함부로 할 말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취재가능성과 접근성을 고려않고 던졌던 것이지요. 무엇보다 ‘생태’를 모르면서 쉽게 생태 운운하는 제 자신이 한심했습니다.
생각 끝에 ‘생태’의 자리를 ‘고라니’로 대체했습니다.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보다 확실하고 구체적인 것 하나로 승부를 걸자는 것이었습니다. 고라니 역시 비무장지대 생태의 주요한 구성 종이니까요.
공문을 넣고 군부대 협조를 받았습니다. 허가받은 시간은 대략 첫날 오후와 다음날 오전 서너 시간이었지요. 철책선 안쪽 물웅덩이를 주시했습니다. 그곳에는 고라니가 좋아하는 연잎이 가득했습니다. 물에 들어가거나 말거나는 순전히 고라니의 의지지요. 오랜만에 느끼는 평화로운 자연 앞에서 초조해하는 생명체는 오직 저 하나 뿐이었습니다.
고맙게도 고라니는 저의 마감을 위해 나타나주었습니다. 풀을 뜯고, 헤엄을 치고, 철조망을 바라보는 여러 고라니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마감을 하며 신문에 쓰려니 한 장이면 충분할 것 같았습니다. 여러 장은 쓸데없는 부연, 구질구질한 변명 같았습니다. 인간에겐 수십 년 동안 정치적, 군사적 긴장이 이어진 공간에서 고라니는 세상 어디에 있을까 싶은 가장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었습니다.
다큐의 착안과 시작은 남북 정상들의 만남이었으나,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완전한 비핵화, 한반도 긴장완화, 정전선언 같이 수없이 쏟아졌던 단어를 쓰지 않고 글을 쓰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애초에 발제하며 ‘고라니 빙의’ ‘고라니 시점’으로 쓰자고 장난처럼 말했는데 실제 그리 되고 말았습니다.
다큐 글은 “나는 고라니다”라고 시작합니다. 난생 처음 동물이 되어 글을 썼습니다. 다소 유치하거나 부끄러울 수 있다는 것을 감수했습니다. 그럼에도 사진에는 딱 맞는 글이라고 내심 뿌듯해하고 있습니다.
[포토다큐] DMZ의 고라니 (2018.6.23 14면)
나는 고라니다. 풀숲에서 아침을 맞았다. 초여름 햇볕이 이른 아침의 찬 기운을 밀어냈다. 간밤에 함께 풀을 뜯던 녀석이 남쪽 물웅덩이에 ‘개연꽃’이 한창이라고 귀띔했다.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물웅덩이로 향하는 길은 늘 즐겁다. 이어지는 무더위에 물이 그립던 터였다. 거친 수풀을 헤치고 개활지를 만나면 겅중겅중 뛰었다. 인적이 없고, 천적도 드물어 살기 좋은 이곳은 남과 북으로 긴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다. 65년 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정착해 살았다고 엄마가 말씀하셨다. 그때 이후 아무도 철책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다.
북쪽 평강에서 남쪽의 철원까지 4㎞쯤 걸었을까. 더운 공기 사이로 물 냄새와 연꽃향이 훅 끼쳐 왔다. 덤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만치 물 위에 노란 개연꽃이 활짝 피었다. 주위를 살피며 다가갔다. 목을 축이고 발을 살짝 담갔다. 아 시원해. 연잎을 한 입 크게 물었다. 연한 이파리가 입 안에서 녹았다.
수영이나 한 번 해볼까. 이래봬도 나의 학명 ‘Hydropotes inermis’는 ‘물(Hydro-)을 좋아하는(-potes)’이라는 뜻이 들었다. 심지어 영어명은 ‘워터디어(water deer·물사슴)’다.
이 여유가 참 좋다. “착착착” 철책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선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굴까. 군 초소 쪽에서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든 인간들이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이고 있었다. 무슨 일일까. 문득, 얼마 전까지 남쪽과 북쪽에서 경쟁하듯 들려오던 확성기의 소음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호로로로록” “휘휘루루” “끼약” “뻐꾹” 확성기에 묻혔던 새들의 노랫소리가 또렷하다 못해 투명하게 느껴졌다.
동물적 감각, ‘야생의 감’이라는 게 있다. 철책 밖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고 있구나. 며칠 전 철원평야를 날아온 철새의 말이다. “모내기 끝난 논에 한반도기가 펄럭이고 있더라.” 낙원의 평화와 아름다움 위로 대립과 적대의 긴장이 흐르던 이곳 ‘비무장지대’에도 변화의 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다. 저 견고한 철책이 열릴 수 있을까. 바깥 세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기대와 설렘 속에 내 가족과 이웃 야생종들의 걱정이 하나 생겼다. 우리 삶의 터전이 망가지지 않겠냐고.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인간이 그리 무정한 종은 아니라고 들었다. 어떤 변화에도 ‘공존’의 가치를 저버리지는 않을 게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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