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 속 외장하드를 꺼냈습니다. 목적을 가지고 꺼낸 게 아니라 꺼낸 다음 목적을 찾았습니다. ‘2010년’ 폴더를 열었습니다. 거기엔 ‘2010남아공월드컵’이라는 하위 폴더가 들었습니다. 그때 사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사진을 넘겨보는 동안 당시 기억들이 불려나옵니다. 사진을 찍던 훈련장, 경기장, 도시와 이동하던 거리 등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일들, 주변의 풍광들이 생각보다 또렷하게 그려졌습니다. 8년 전으로의 여행이었지요.
한 장의 사진에 시선이 멈췄습니다. 사진은 8년 전의 시간에서 다시 지금의 자리로 돌려 놓았습니다. 재밌는 사진이었습니다. 8년 이라는 시간의 결코 짧지만은 않은 세월임을 느끼게 했습니다. 찍을 당시에는 그저 밋밋한 훈련사진이었는데 말이지요.
사진설명에는 "한국 월드컵 대표팀이 2010남아공월드컵 나이지리아전이 열리는 더반에 입성한 20일, 선수들이 프린세스 마고고 경기장에서 헤딩패스를 이어가는 게임을 하고 있다."고 돼있네요. 짐작하시겠지요? 사진 속 이영표, 박지성, 안정환 세 선수는 8년 후 각각 KBS, SBS, MBC의 2018러시아월드컵 해설위원이 되었습니다. (서 있는 순서가 시청률의 순일까요?)
당시 기분 좋은 첫 승 상대, 그리스와의 경기 선발출전 선수들 기념사진도 흐른 시간을 느끼게 합니다. 저 선수들 중 러시아월드컵엔 기성용만 뛰고 있네요. 차두리는 코치로 대표팀에 합류했지요. 가깝고도 가깝지 않은 과거가 된 사진은 세월은 누구에게나 어김없이 공평하게 흐른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당시엔 30대였군요. ㅎㅎㅎ
남아공월드컵은 우리 대표팀이 해외에서 ‘첫 16강’에 오른 대회였지요. 그때 저는 ‘역사적인 월드컵’을 기록하는 사진기자로서 16강 진출의 기쁨이 작지 않았습니다만, 한 경기 추가로 출장이 닷새 이상 늘어나 투덜거리기도 했었지요. 지쳤고 기쁨 이전에 일단 긴장되는 일이다 보니...
하지만,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제 ‘인생샷’이라고 할 만한 사진을 건지게 됩니다. 블로그에 한 번 썼던 사진인데 다시 보니 또 그 현장의 리얼한 영상이 되살아나는군요. 후반전, 우루과이 공격수 수아레스가 굵은 빗줄기 속에서 역전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린 뒤 골 세리머니를 하는 장면입니다. 흥분한 수아레스가 경기장을 돌아 A보드 광고판을 뛰어넘는 순간, 사진을 찍던 제가 그의 발아래에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외신사진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돼 전 세계에 타전됐습니다. '한국의 8강행 좌절'이라는 묘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악동' 수아레스는 이번 월드컵에서도 활약이 대단하더군요. 어쨌든 대표팀의 첫 16강 진출이 비록 굴욕적일지언정 인상적인 제 기념사진을 남겨주었습니다. 저에게는 가장 기억에 남는 '월드컵 명장면'입니다.
4년 마다 한 번쯤 열어보는 외장하드 속 남아공월드컵 사진들. 4년 뒤에는 어떤 말을 걸어올까요.
러시아월드컵 우리 대표팀을 응원합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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