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고마워요, 샤킬씨'

나이스가이V 2018. 5. 16. 16:55

한인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편하고 안전한 차량렌트를 권했습니다. 10여 년 전 이곳 방글라데시에 와서 처음 오토릭샤(CNG)를 타던 날 사고가 나 그 이후 절대로 타지 않는다면서 말이지요. 오후에 잡혀있는 인터뷰를 앞두고 아침밥을 먹고 숙소를 나선 일행은 그냥 오토릭샤를 탔습니다. 여행지로는 좀처럼 추천되지 않는 다카라는 도시를 경험하기엔 가장 적절한 교통수단이었지요. 조그만 불편과 위험은 감수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인터뷰 약속 장소인 다카국립대로 향했습니다. 서둘러 출발한 건 인근에 있는 방글라데시국립박물관 관람을 위해서였죠. 외국인이라 5배를 더 내고 들어가 신속하게 둘러봤습니다. 거리의 사람과 차량의 밀도가 공간을 인식하는 기준인 듯 전시물들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었지요. 식물부터 현대미술까지 모든 것이 망라돼 있었지요. 시인 타고르가 방글라데시인이라는 것에 놀랐고, 한국관이 따로 있는 게 신기했고, 세계적인 화가의 명작이 좀 어설프게 프린트된 채 걸려 있는 것이 의아했지요.

 

한 끼 때우려 다카대학 야외 카페테리아로 갔습니다. 햄버거세트를 먹기로 결정한 순간 돈을 달라는 아이가 달라붙었습니다. 경계심이 발동하고 그 집요함에 짜증이 났지요. 햄버거를 포기한 채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과 몇 시간 뒤 눈치를 챈 건, 여기 사람들은 돈을 달라는 이들에게 생각보다 쉽게 돈을 쥐어준다는 것이었지요. 구걸이 당당하고 주는 것도 인색하지 않아보였습니다. ‘다수가 가난한 나라에서 나름 나눔의 방식일까?’ 싶었지요.

 

결국 다카대 구내식당에 들어섰습니다. 20타카(260원쯤)의 저렴한 점심식사 메뉴는 오직 하나. 노란 밥에 작은 닭조각 하나가 허무하게 빠진 묽은 카레. “익스큐즈미, 두유헤브 포크 올 스푼?” 주방 사람들에게 참 낯선 질문이었습니다. 일단 학생들을 따라 손을 씻고, 잠시 머뭇거리다 카레를 밥 위에 흩뿌리고 손가락으로 밥을 이리저리 비벼 모았습니다. 따로 노는 밥풀을 힘주어 붙들고 입으로 집어넣었습니다. 절반은 흘리고 입 주위에 밥풀을 붙여가며 먹었습니다. 우릴 둘러싼 대학생들의 뭇 시선을 느꼈습니다. 큰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던 겁니다.

 

 

오후 2시 인터뷰 대상인 샤킬씨를 만났습니다. 그는 기획 취재 출장지인 이곳 방글라데시에서 취재팀의 통역을 맡았던 분입니다. (경향신문이 곧 멋진 기획을 선보입니다!!) 16년간 한국에서 노동자로, 이주노조 활동가로 살았습니다. 방글라데시로 돌아온 지는 10년이 되었답니다. 사실 출장의 공식일정은 마무리됐지만 아쉬움이 크게 남았던 취재기자가 전날 인터뷰(경향신문 55일자 보도)를 요청했던 것이지요.

 

인근 공원에서 샤킬씨의 인터뷰가 진행됐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독재반대 운동을 했고, 20대에 한국에 가서 노동자로 살다가 이주노조 운동에 뛰어들었지요. 2008MB정권 때 활동가에 대한 표적단속으로 다카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 40대 중반. 청춘을 한국에서 보냈습니다. '그와 내가 활동가와 사진기자로 어느 현장에서 마주치지 않았을까.' 왠지 한 번은 마주쳤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의 얘기에 어렴풋이 제 기억이 포개지는 부분이 있었지요. 이 글을 쓰다말고 회사 사진DB를 뒤졌습니다. 한 장의 사진을 찾았습니다. 그와 저의 인연은 2007년 한국에서 시작되었지요. 

 

 

인터뷰 사진을 찍기 위해 다카적인거리가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이동할 때 샤킬 선생이 말했습니다. “이렇게 털어 놓으니 정말 속이 시원합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가슴에 쌓아둔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 말에 미안했고, 조금 짠했습니다. ‘참 다행이다. 인터뷰를 할 수 있어서.’ 그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습니다. 샤킬씨는 다음날 자신의 집으로 우릴 초대했습니다.

 

 

 

듣던 것보다 안전하고 차보다 매력적인 오토릭샤를 올라타고 샤킬씨의 집이 있는 남다카 주레인으로 갔지요. 낡은 상가건물 앞에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얼굴이 좀 더 하얗다는 이유(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로 일행은 벵갈인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인구밀도가 높다는 것을 개념이 아니라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밀려서 오고가는 사람들과 꼬리를 문 각종 차량이 얽히고설켰고, 정지한 듯 거리를 메웠습니다. 진창길과 곳곳에 파인 물구덩이, 그 안에 떠다니는 쓰레기가 눈에 띄었습니다. 샤킬 선생이 남다카에서 진짜 방글라데시를 볼 수 있다고 한 것이 이런 거구나 했지요.

 

 

 

샤킬씨를 만나 다시 동네 CNG’ 올라탔습니다. 골목길을 한참 달렸습니다. 골목 곳곳에 물이 넘쳤습니다. 오토릭샤 바퀴 절반이 물에 잠긴 채 비릿한 냄새의 하수를 튕겼습니다. 어느 골목 끝에 초록과 노랑, 주황으로 채색된 그의 집은 골목 하수에 무거워졌던 이방인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습니다.

 

샤킬씨의 아내 시에다가 차려준 점심상은 정성이 가득했고 입맛에 잘 맞았습니다. 그의 집 1층에는 이웃의 릭샤 운전사, 가사도우미 등 노동자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 수업이 한창이었지요. 그가 운영하는 기쁨공부방입니다. 아이들과 선생님이 안녕하세요하고 반겨주었습니다. 옆에서 그가 뿌듯하고 넉넉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샤킬 선생은 인터뷰에서 다시 26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한국에 가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고단했던 삶과 상처를 짐작했습니다. 40대 중반에 고국에 돌아와 뒤늦게 이룬 가정과 그로 인한 행복이 지난날을 더 아쉽게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샤킬씨는 출국을 위해 북다카로 돌아가는 일행의 오토릭샤를 잡아주고 흥정까지 대신해 주었습니다. 릭샤가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정말 보고 싶어요." 그의 인터뷰 마지막 말은 함께 활동했고 또 도움을 주었던 한국인 동지들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었지요. 옛 동료들과 가끔 찾았다던 "해운대에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찍혀비자발급이 안 될 거라 했습니다

 

샤킬씨가 아내 시에다, 딸 이디다의 손을 잡고 해운대 백사장을 밟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yoonjoong

'사진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월드컵 최고의 장면  (4) 2018.06.22
'맥주 한 잔'  (0) 2018.06.10
"얘들아, 아저씨 신기하지?"  (4) 2018.05.01
'길 위에서'  (0) 2018.04.20
"그건 '니오타니' 예요"  (0) 2018.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