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로 출근하는 길에 마크 리퍼트 미 대사의 피습 속보가 휴대폰에 떴습니다. 평소 속보에 민감하지만 쏟아지는 속보 속에 가치 없는 속보, 낚는 속보도 많아 ‘미 대사의 피습’이라는 말에도 ‘의심’이 고개를 듭니다. 직업병이지요. 그 피습의 정도와 내용의 진위까지 의심하게 됩니다. 뉴스가 클수록 오히려 의심은 더 커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심의 순간은 잠깐이고 다시 직업적 현실로 돌아옵니다. 미 대사 조찬 강연에 우리 부서에서는 취재를 갔을까. 갔다면 이 상황을 찍었을까.
국회 기자실에 들어서니 뉴스채널들이 경쟁적으로 속보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채널은 영상을, 그렇지 못한 채널은 사진 한 장 띄워놓고 한·미 관계와 파장, 용의자 신상과 배후 등의 얘기들을 늘어놓고 있었지요. 늘 출연하는 고정 패널들이 조금 전 발생한 돌발 사건을 평가하고 해석하는 것이 참 신기했습니다. 한 패널은 “개량한복에 수염을 기른 사람을 왜 의심하지 않고 들여보내느냐?”는 말도 하더군요. ‘막 던지는구나’ ‘앞으로 개량한복 입고 수염 기르기도 힘들겠구나’ 싶었습니다.
기자실에서는 피습 순간을 어느 매체의 누가 찍었으며, 누구의 사진이 가장 현장감 있게 기록되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고 사진과 사건에 대한 평가가 오갔습니다. 조찬 강연 행사를 미처 챙기지 못한 회사의 탄식도 섞여듭니다. 대형 사건을 예측하고 취재할 재주는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지요. 저희 신문도 그 순간을 기록하지는 못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현장을 놓친 기자들은 여유 없이 분주하기 마련입니다. 만회하려는 직업적 본능이지요. 뒤늦게 병원과 대사관 주변을 스케치하며 현장을 기록하지 못한 ‘원죄’를 씻어내기 위해 발품을 팝니다. 수고에 비해 결과물은 그저그렇습니다.
이날 국회의 일정도, 정치인의 발언도 모두 '미 대사 흉기 피습'에 맞춰져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입에 오르내리던 대한민국 모든 현안들은 동맹국 대사의 피습이라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렸지요.
사상 초유의 미 대사 피습은 다음날 모든 일간지 1면을 장식할 것이 불 보듯 하지요. 통신사 사진, 자사 사진, 제공 사진 중에서 가장 적절한 사진을 고르려 머리를 싸맸을 겁니다. 흉기에 피습당한 바로 직후의 사진과 손수건으로 상처부위를 막고 피 흘리며 걸어 나오는 리퍼트 대사의 사진 중에 하나를 쓸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자극적인 사진이라 신문 독자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지요. 사건의 크기와 사진의 크기는 통상적으로 비례하지만 피가 흥건한 사진의 크기를 키우기는 부담입니다. 사진을 흑백으로 쓸 것인가, 컬러로 그대로 내 보낼 것인가도 치열하게 고민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 고민들이 다음날 신문 1면에 고스란히 나타나겠지요. ‘온라인에서 이미 다 보았을 사진인데...’라는 판단도 당연히 거기에 스몄을 겁니다.
전 신문이 예외 없이 같은 사건을 1면 톱에 싣는 날이 한 해에 몇 번이나 될까 생각해 봅니다. 많아야 두 번쯤? 미 대사 피습 사진 게재도 까다로운 작업이지만 제목 또한 만만치 않은 고민의 결과물입니다. 이 사건의 제목은 신문의 정체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큽니다. 짧은 문장에 사건과 사건을 보는 신문의 시선이 담깁니다. 마른 걸레에서 물 짜내듯 제목을 뽑았을 테지요. 독자 입장에서는 뭐 거기서 거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신문쟁이들, 소위 ‘선수들’ 사이에서는 자존심 걸린 승부욕이 발동합니다.
9개 조간신문 1면을 모아봤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일제히 한 사건을 톱으로 다루는 날 신문을 찍어서 모아야 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얘기가 좀 딴길로 샙니다만, 생각해보면 사진기자들은 좀 못됐습니다. 잔인한 현장, 누군가의 고통과 아픔, 슬픔의 현장에서 사진을 찍었느냐 찍지 못했느냐, 찍을 수 있느냐, 찍을 수 없느냐에 늘 신경이 곤두서기 때문이지요. 현장에 온 신경을 집중한 나머지 다른 여러 상황을 살피지 못해 욕도 많이 먹습니다. 하지만 기록되지 않는 것은 역사가 되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르면 사진기자들의 욕심에 어느정도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을까요?
마크 리퍼트 미 대사가 저하고 동갑이더군요. 동갑내기를 보면 이유없이 짠해집니다. 쾌유를 빕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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