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을 다녀왔습니다. 먼저 3승 고지에 오른 두산이 이날 삼성을 꺾으면 한국시리즈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기자실에 들어서니 오랜만에 보는 스포츠지 선후배들이 반겨줍니다. 준플레이오프부터 수차례 연장 끝 승부와 한국시리즈를 취재하며 심신이 지친 선후배들은 특정 팀을 응원해서가 아니라 이날 끝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습니다. 축적된 경험이 있는지 스포츠지의 한 선배는 "종합(일간)지에서 취재 오는 거 보니 왠지 불길한데..."하고 웃습니다. "대구 가게 되면 니 탓이다”라며 제게 미리 뒤집어 씌웠지요.
오후 6시 경기인데 3시쯤 도착해 자리 추첨을 했습니다. 매체가 워낙 많기 때문이지요. 선착순이라고 했으면 전날 와서 진을 쳤을 것이 분명하기에 나름 정제된 시스템입니다. 경기를 앞두고 비가 세게 내리자, '오늘 한다, 못 한다' 의견이 엇갈립니다. 분분한 의견을 떠나 오늘 꼭 해야한다는 게 정답인거죠. 연기되면 또 피곤함이 하루 더 연장되므로. 비가 계속되는 동안 기자실 내부는 분주합니다. 우비와 종이상자를 이용해 비로부터 카메라와 노트북을 보호할 물건을 제작합니다. 노트북을 덮기 위해 상자 한쪽이 트이도록 테이핑을 하고 우비의 팔부분을 잘라 렌즈에다가 끼워 넣습니다. 상자로 노트북 받침대까지 제작합니다. '도구적 인간'이란 말이 그렇게 와 닿는 순간이 언제였나 싶었습니다.
비 때문에 예정보다 30분쯤 늦게 경기가 시작됐지요. 저는 홈 그물 뒤쪽에 앉았습니다. 1회 초부터 정신이 없습니다. 벼랑 끝에 선 삼성이 3점을 내며 달아나고 1승을 남긴 두산이 곧 따라붙고 동점과 역전이 반복되며 승리의 향방을 알 수 없이 진행됐지요. 승리를 가르는 순간이나 그 순간의 극적인 표정 등이 신문에 크게 실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 물론 두산이 우승한다면 경기 종료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환호와 감격의 세리머니 등이 지면을 장식하겠지요. 하지만 매 순간이 승부처가 될 수 있기에 꼼꼼히 사진으로 기록하고 전송을 합니다. 마치 문자 중계하듯, 사진 중계를 하는 셈이지요. 1회부터 카메라 파인더와 노트북 모니터를 번갈아 보며 어떤 작은 여유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정말 정신 없더군요.
제가 입사했던 2000년 잠실야구장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필름을 사용했고 카메라의 포커스를 손으로 돌려 맞춰야 했던 시절입니다. 기본중에 기본이 손가락을 빨리 그리고 미세하고 움직여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다 보니, 병아리기자가 훈련하기에는 스포츠 만한 것이 없었지요. 경기가 있는 날은 웬만하면 잠실로 나갔습니다. 사진을 많이 찍고 많이 전송하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환경이었습니다. 1회가 젤 중요합니다. 발 빠른 각 팀의 1번 타자가 도루할 확률이 크지요. 1번 타자가 출루하면 홈 뒤에 앉은 기자들은 2루 베이스에 미리 포커스를 맞춰 널널하게 앵글을 잡아 둡니다. 주자가 뛴다 싶으면 앵글 안에 주자가 들어오는 순간 셔터를 디립다 누릅니다. 가끔 홈에서 이뤄지는 아슬아슬한 장면이 나오면 회사로 들어갈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5회 클리닝타임 무렵 퀵서비스 아저씨가 필름을 걷으러 옵니다. 각 사 기자들은 자사 로고가 새겨진 노란 봉투에 필름을 담아 아저씨 편에 배달하지요. 부서내 근무자는 이를 받아 현상하고 사진을 골라 스캔을 받고 그렇게 신문에 썼습니다. 대다수 사진이 2루 도루 장면임은 말할 것도 없지요. 당시 잠실의 사진기자들은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뜨곤 했습니다.
그랬던 현장의 환경이 10여 년의 세월동안 완전히 변해버린 겁니다. 필름 시대가 막을 내리고 디지털 시대가 열린 것이 가장 큰 변화구요. 2002년 한일월드컵을 경험하면서 스포츠 사진에 대한 다양성이 커졌구요. 전문지, 온라인 매체 등이 빠른 속도로 늘어난 것도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여하튼 다시 한국시리즈 5차전 얘기로 돌아오면, 경기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양팀의 환호 모습과 조금 좌절한 모습 등이 담기는 대로 부지런히 전송을 했습니다. 8회 5대5의 팽팽한 균형을 깨는 삼성 박한이의 2타점 적시타가 터졌습니다. 이 순간 카메라는 박한이를 따라가야 하는게 정상입니다. 그러나 저는 홈으로 질주하는 선행 주자를 따라갔습니다. 순간 판단을 잘못한 것이지요. 1루로 눈을 돌렸을 때에는 박한이의 동작 큰 환호가 그림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본다고 다 찍는 것은 아니지요. 8회까지 실컷 고생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물을 먹은 겁니다. 사진을 제대로 찍기 위해서는 경기의 흐름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빠른 선택의 능력이 필요한 거죠. 야구를 좋아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랑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누적 방문자 400만 명에 육박하는 ‘스타샷’의 파워블로거 '노가다찍사'님께서 3루 더그아웃 쪽에서 이를 잘 잡아 지면을 장식 했습니다. 대부분의 신문이 이 장면을 크게 썼습니다.
게임이 펼쳐진 4시간은 정신없이 지나갔습니다. 사진기자들이 경기만 보는 것도 아닙니다. 관중석에 누가 왔는지도 부지런히 살핍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나 연예인들도 사진 취재의 대상이 되구요. 누가 시구를 하는 지도 관심입니다. 이날은 개그맨 김준호가 '꿈에 그리던' 시구를 했습니다.
이래저래 사진기자의 진을 빼놓는 프로야구입니다. 결국 대구에서 우승 반지의 주인공을 가리게 됐습니다. 기자실 들어설 때 불길하다던 스포츠지 선배의 감이 정확했던 것이지요. 경기 후 카메라와 노트북을 챙기며 그 선배에게 한마디 툭 던졌습니다. “다 저 때문입니다. 대구 잘 다녀오십시오!” ^^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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