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마을로 알려진 경기 양평 주읍리. 겨울 초입에 서리와 바람을 맞고 이파리를 모두 떨어낸 산수유에는 빨간 열매만 남았습니다. ‘자세 좋은’ 산수유를 찾아서 마을을 둘러보는 동안 두어 대의 차량이 지나갈 뿐 주민들이 보이지 않았지요. 마감시간은 다가오고 산수유나무 근처로 주민이라도 지나가야 사진이 되겠다 싶어 이 마을의 산수유 권역위원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분께 연락을 했습니다. 그는 “KBS ‘6시 내 고향’에서 촬영 나와 주민들이 거기 다 간 모양”이라면서 자신도 “촬영 때문에 공장 기계를 돌려야 하는데 고장 나서 애를 먹고 있다”고 하소연을 하더군요. 알아서 하란 얘기지요. ^^
길가에서, 빛을 잘 받고 있으며, 여러 그루가 한데 모여 있는 산수유를 찾아내 앵글을 잡고 누구라도 지나가 주기를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때 인기척이 있어 굽은 길을 돌아 내려가니, 머리 하얀 어르신이 집 앞마당을 거닐고 계셨지요. 여차저차해서 왔는데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네요"라고 말하면서도 차마 어르신께 '산수유 앞을 지나가달라'는 부탁을 하지 못했습니다. 마감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일단 기다리자며 다시 산수유를 바라보고 섰는데, 어르신이 낮은 철제 울타리를 밀고 나와 손을 뻗어 산수유 열매를 따서 입에 넣었습니다. 그 모습은 느린 화면처럼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셔터를 눌렀습니다. 조금 전 제 얼굴에 스쳤던 난감한 표정을 읽으셨던 것인지, 저를 위해 기꺼이 모델이 되어 주셨던 겁니다. 감사 인사를 하자, 맛보라며 산수유 열매 한 움큼을 쥐어 주시데요.
쌉싸래한 산수유 열매를 씹으며 "마당 딸린 집이 참 좋다. 그런 집에서 살고 싶다"며 운을 뗐습니다. 마감까지 남은 시간에 어르신 말벗이나 되어야겠다, 생각했던 것이지요. 어르신은 은퇴한 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왔다고 했습니다. 땅을 사서 집을 짓고 마당 한쪽에 밭을 일구기까지의 과정을 얘기했고 울타리 주위에 손수 심은 각종 유실수들을 가리켜가며 뿌듯해했습니다. 지난 세월이 집안 곳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해 77세라는 어르신은 병원 가까운 서울로 다시 가려고 집을 내 놓았다고 했습니다. 표정에 아쉬움이 묻었습니다. 아픈 몸에 대한 아쉬움인지, 떠나야 할 집에 대한 아쉬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20분쯤 선 채로 얘기를 나눈 뒤 마감을 위해 차로 향했습니다. 도시를 벗어난 곳에서 만나는 어르신들은 초면인 사람에게도 참 살갑습니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곧잘 쏟아 놓습니다. 집과 마당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낮은 울타리처럼 마음도 그렇게 열려 있는 모양입니다. 서울로 돌아간 어르신이 그 마음을 높은 콘크리트 벽처럼 닫아버리지는 않을까,하는 괜한 걱정이 들었습니다.
처음 어르신을 봤을때 볕 좋은 마당을 거닐던 모습은 지난 15년의 전원생활을 정리하는 '의식'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행여 어르신이 저로 인해 잠시 무료함에서 해방되셨다면 그건 제가 드린 '모델료'입니다. ^^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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