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고?

나이스가이V 2013. 11. 19. 08:00

한달 전, 일을 위한 산행은 그냥 노동이라고 블로그에 썼습니다. 요즘 데스크가 자꾸 저를 산으로 보내는군요. 이번에는 새벽산행이었습니다. 약간의 무서움이 동반된 역시 '노동'이었지요.

 

새벽 450분 북한산성 성곽에 있는 동장대(산성수비의 총 지휘소)’를 향해 걸었습니다. 달도 없어 완전 깜깜한 시간의 산행이었습니다. 홀로 산행이 부담스러워 취재차량 운전하시는 형님께 동행을 부탁했습니다. 헤드랜턴과 손전등이 비추는 딱 고만큼만 밝히면서 산을 탔습니다. 이 인공의 불빛 이외엔 까만 하늘에 맺힌 별빛이 전부. 사위는 온통 암흑이었습니다. 오가는 사람도 전혀 없구요.

 

열흘 전쯤 같은 취재 건으로 조선 숙종 때 지었다는 행궁(임금의 임시거처)터를 찍으러 다녀갔기에 행궁 옆길을 따라 동장대에 이를 수 있다는 경기문화재단 관계자의 말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오르면 되겠지, 했는데 분간이 되지 않는 길 위에서 헤맬 수밖에 없었지요. 산을 쉽게 본 겁니다. 몇 차례 갈림길에서 혼란스러웠고 결국 길을 잃었습니다. 해 뜨는 7시까지 성곽에 도착해야 하건만, 얼마간 다시 걸어 내려와 무의미한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그 와중에 이런 어둠속 갈림길이 숱한 갈등과 선택의 연속인 인생을 함축하고 있다는 흔하고도 한가한 생각을 했습니다.

 

우왕좌왕 하던중 공사중인 듯한  중흥사지(절터)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보았습니다. 그 시간 예불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았으니 그저 켜 놓은 불이라 생각했지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 다가갔더니 방 앞에 반가운 신발 한 켤레. 인기척에 스님이 내다봤고, 여차저차 동장대로 간다, 하였습니다. 스님은 손전등으로 전방에 펼쳐진 암흑에 선을 아래위로 그으며 계곡을 따라 난 길을 계속 올라가라, 그리고 대동문 이정표를 보고 왼쪽으로 올라가라, 말씀하셨지요.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입니다조금 더 헤맸더라면 취재 자체를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지체한 시간을 만회하려 속도를 냈습니다.

 

발밑을 살피는데 급급해 어둠에 묻힌 대동문 이정표를 지나쳤습니다. 하늘이 조금 밝아져 오자, 마음은 조급해 집니다. 대성문이라 쓴 이정표를 보고 왼쪽 경사를 무작정 탔습니다. 대동문과는 꽤 거리가 있는 문에 이르렀고 대동문과 동장대를 향해 성곽을 따라 뛰듯이 걸었습니다. 목적한 곳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서 여명의 하늘이 붉게 펼쳐졌습니다. 장관이었습니다. 여전히 어둠에 묻힌 성곽 안과 붉게 젖어오는 성곽 밖 서울 도심. 도시의 빼꼭한 건물들은 운무에 묻힌 듯, 떠 있는 듯 어슴푸레 내려다 보였습니다. 지금 눈으로 목격하고 있는 이 장관이 사진으로 오롯이 표현될 수 있을까를 걱정하며 연방 셔터를 눌렀습니다.

 

 

앞쪽 성곽을 걸고 찍으려니 저 멀리 성곽 길에서 서너 명의 등산객이 이 장관에 시선을 두고 있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등산객의 출현은 사진에 생동감을 더하였습니다. 금세 해는 솟아올랐고 다시 걸어 도착한 동장대에서는 앞뒤 풍광이 나무에 가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건지지 못했습니다. ‘이정표를 놓쳐 돌아서 성곽에 오른 것은 어떤 계시인가, 했지요. 길을 잃은 것도, 스님을 만난 것도···.

 

 

 

초코파이 두 개를 허겁지겁 까먹고 환한 등산길을 여유롭게 걸어 내려왔습니다. 올라오는 길에 모든 것을 감추었던 산이, 그래서 두려웠던 산이 그제야 떨어진 오색단풍을 보여주고, 그 위에 내려앉은 고운 서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지나쳐 간 대동문 이정표와 멧돼지 만났을 때 행동요령 알림판도 보였습니다. 등산로를 감싸 안고 있는 산세의 아름다움도 눈을 즐겁게 했습니다. 다섯 시간의 산행으로 경험한 북한산은 경외’란 단어로 남았습니다.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는 한 산악인의 말이 참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말이지요.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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