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동네 곳곳에 탁구장이 생겼고 연일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제가 살던 아파트 지하에도 탁구장이 생겼습니다. 밥숟가락 놓자마자 탁구장으로 달려가도 1시간 이상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게 다반사.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탁구는 큰 즐거움이었고 탁구장 주인들에게는 든든한 밥줄이었습니다. 그해 서울올림픽에서 유남규 선수가 금메달을 따내면서 탁구의 붐이 일었던 것이지요. 당시 영웅이었던 유남규는 이제 국가대표팀 감독이 되었습니다.
지난 18일 그의 사진을 찍기 위해 태릉선수촌을 찾았습니다. 앞서 15일 날 서울 시내 호텔 커피숍에서 인터뷰가 진행됐지만, 사진 찍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다시 약속을 잡아 선수촌을 찾은 것이었지요. 오후 대표팀 훈련시간에 맞춰 3시쯤 도착했습니다. 유 감독이 전화를 걸어와 한 시간정도 경기력 향상을 위한 회의가 있어 4시쯤 만나자고 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4시가 넘자 문자가 왔습니다. 회의가 길어져 끝나는 대로 연락하겠다고. 5시가 조금 넘어 제게 전화를 하며 어딘가에서 헐레벌떡 달려 나왔습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회의 중에 잠깐 나왔다고 했습니다.
훈련장 탁구대 앞에서 급해 보이는 그에게 역시 급한 제가 미소를 요구했습니다. 회의 분위기가 무거웠던지 미소를 쉽게 짓지 못했습니다. 거듭된 요구에 표정이 조금 자연스러워지자 이번엔 선수들을 지도하는 모습도 부탁했습니다. 급해지면 난사를 하게 됩니다. 길지 않은 시간에 엄청 찍었습니다. 뒤로 1988년 올림픽 당시 시상대에 오른 그의 모습이 큰 사진으로 걸려 있었습니다.
“다 찍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는 말에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언제 신문에 실리는지 문자주세요. 또 가봐야 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회의장으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유남규 서브~”라고 외치며 몹쓸 스핀을 먹여 친구의 약을 바짝 올렸던 기억이 그 순간에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국가대표 감독이 된 옛 추억 속 영웅을 만난 지금의 제가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구요. 그 시절 같이 탁구 치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뭐하며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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