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재갈을 물다

나이스가이V 2020. 5. 4. 16:56

두 달이 지나간 얘기를 꺼냅니다. ‘왜 갑자기?’라고 물으신다면. 코로나19를 지나면서 누가 고통을 많이 받는가, 누가 더 많이 아프고, 힘든가를 물어야 한다는 김승섭 교수의 인터뷰 문장에서 한 번, 노동절을 지나면서 또 한 번 자연스럽게 떠오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진을 한 장 올립니다. 누군지도, 어디에 소속이 됐는지도 알 수 없는 두 인물의 사진입니다. 지난해 11월 지면에 게재된 사진이지만, 지금 이 블로그에 다시 쓰면서 이제 이렇게 밖에 쓸 수 없는 사진인가?’하고 묻게 됩니다. 무력한 물음이자, 나름의 시위입니다.  

지난 2월 어느 날 두툼한 문서가 사진부장 책상 위에 놓인 것을 지나치듯 봤습니다. 언론중재위원회에서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사진 강의를 한 적이 있는 부서장에게 보내는 중재위의 소식지라 생각했습니다. 시선을 돌리는데 익숙한 기사 제목이 잔영처럼 남았습니다. 다시 보았습니다. 석 달 전 제가 찍고 썼던 다큐기사에 대해 언론중재위가 보낸 조정신청서와 출석요구서였습니다.

 

기사는 조국 사태로 상징되는 금수저 논란에 박탈감을 느낀 흙수저 청년노동자들의 노동현실을 보여준다는 취지로 기획한 다큐기사로, 각기 다른 직군의 세 청년노동자들의 얘기를 담았습니다. 중재위 문서는 그 중에 중소병원에서 치료사로 일하는 노동자 기사에 대한 조정신청 내용이 적혀있었습니다. 해당 기사에는 청년노동자의 불안한 고용과 저임금, 벌이에 눈 먼 병원, 노조 결성과 작은 성과 등에 대한 노동자의 인터뷰 내용이 사진과 함께 담겼습니다.

 

기사에 대한 정정보도와 손해배상을 신청한 이는 해당 병원의 원장이었습니다. 조정신청서를 읽다 화가 치밀었습니다. 기사 안에서 딱 한 단어를 걸고 늘어졌습니다. “지하주차장을 개조해 치료실을 만들었다는 부분입니다. 병원은 지하주차장으로 사용된 장소가 아닌, 임대 가능한 지하층에 불과한 장소에 해당한다며 허위사실이라는 겁니다.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인용한 표현이었고, 예전 다른 매체의 기사에서도 같은 표현이 인용됐다는 것을 확인하고 썼던 문장이었습니다. 뒤이은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서 노동자들은 각종 질환에 시달렸다라는 문장을 위해 지하라는 열악한 노동환경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병원 측은 지하층이지만 지하주차장이었던 적이 없다는 것을 각종 문서로 증빙해왔습니다. ‘지하층을 치료실로 만들었지, 지하주차장을 치료실로 만든 사실이 없다는 말이었지요.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와 노조 탄압에는 함구하고, ‘지하주차장이라는 표현에 잘 걸렸다며 꼬투리 잡아 중재위에 조정신청을 한 것이죠. 병원 측의 저의를 짐작하고도 남았습니다. 아마도 지하주차장이라는 표현이 기사에 없었다면 다른 걸 가지고 걸었을 테지요. 지금 솟는 이 분노조차 의도한 것일까, 하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병원 측의 조정신청 내용에 대한 저의 입장을 담은 답변서 마지막 부분을 옮깁니다. (기사를 쓸 때마다 중재위에 불려가 이젠 중재위 출석이 편안해졌다는 멋진 회사 후배의 도움과 격려로 답변서를 열심히 작성했습니다. 고마움을 전합니다.)

 

지하주차장 개조는 기자가 자의적으로 작성한 내용이 아니라 신뢰할 만한 상당성이 있는 취재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술된 점, 기사가 사회문제인 비정규청년노동자의 노동현실을 환기하는 공익적 목적으로 작성된 점 등으로 정정보도와 손해배상 청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상식을 벗어나지 않은 취재과정을 밟아 작성된 피신청인의 악의 없는 기사에 대한 이 같은 조정신청은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언론의 기능을 위축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청인의 조정신청에 대해 기각결정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병원 측은 같은 기사로 해당 노동자를 형사고소했습니다. 이 노동자는 중재위 조정 건으로 인한 저의 불편함을 자신의 잘못인 것처럼 거듭 미안해했습니다. 지난 몇 년을 병원 측의 고소고발에 시달리던 이들 앞에서 작은 신경쓰임을 불평할 수 없었습니다. 입사 후 처음 겪는 언론중재위 출석을 제법 긴장하며 기다렸습니다. 정작 출석 당일에는 조정결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부장이 저 대신 출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손배소는 기각됐고, ‘지하주차장이 언급된 부분에 대해서는 정정보도 결정을 받아들였습니다.

 

지하주차장이 아니었다고 기사 내용이 정정되었다는 것으로 기사의 본질적인 부분이 바뀐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병원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귀찮게 할 테니, 병원 일에 관심(취재) 끊어라는 겁박인 것이지요. 사실, 다큐기사의 사진과 글에는 병원의 실명조차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중재위에서는 치료사 얼굴과 복장으로 그 병원이 특정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며 잠시 갈등하다 모자이크를 한 이유입니다.

 

앞으로 이 노동자들의 외침을 어떻게 찍을 수 있을까.

병원이 던진 재갈을 덥석 물어버린 것 같은 참 더러운기분입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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