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의 정치드라마를 본 것 같습니다. 드라마적인 요소가 많은 곳이 국회지요. 국회 출입 사진기자인지라 매일 펼쳐지는 드라마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무엇인지를 포착하려 애썼습니다.
메르스의 위기가 절정에 이를 무렵 해외출장을 갔다가 10여일 지나 돌아온 6월 26일, 신문 1면은 메르스가 아니라 “배신의 정치, 심판해야...”라는 제목에다가 굳은 표정으로 발언하는 박 대통령의 사진이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그렇게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한 것이지요.
‘배신자’로 낙인찍힌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다음날 대통령에 “진심으로 죄송하다. 마음 푸시고 마음 열어주시길 기대한다”며 몸을 바짝 낮췄습니다. 메르스로 수세에 몰린 박 대통령이 정치적 공세로 국면을 전환시킨 것도 극적이며 대통령에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인 유 원내대표의 모습도 드라마적이라 생각했습니다.
새누리당 최고위 회의 때마다 친박(친 박근혜)계 최고위원 등이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종용합니다. 특히 김태호 최고위원은 회의장 바로 옆자리에 앉아 대놓고 사퇴를 촉구합니다. 유 원내대표의 표정은 덤덤했습니다. 심경이 복잡하고 화도 났을 테지요. 국회법 개정안이 '유승민 사태'의 원인이었다면 개정안에 합의했던 최고위원을 비롯한 지도부가 함께 감당해야 할 문제일 텐데 유승민 한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것이 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정치드라마에 대한 이해부족이겠지요. 유 원내대표를 지키려는 비박계의 목소리도 들렸습니다. 긴장이 계속되면서 드라마는 절정을 향해 달려갑니다.
김태호 최고위원이 2일 열린 최고위회의에서 “콩가루 집안 잘 되는 것 못 봤다”며 유 원내대표의 결단을 다시 공개적으로 요구했고, 이에 원유철 정책위의장이 “이해가 안 된다. 너무하다”며 김 최고위원에 반발했습니다. 김 최고위원이 재차 사퇴를 촉구하려들자, 김무성 대표가 “그만해. 회의 끝내”하고 자리를 박차고 회의장을 떠났습니다. 대표 뒤에서 김 최고위원이 “대표님,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하고 소리 질렀습니다. 이 장면이 유승민 사태의 ‘클라이맥스’가 아니었을까요.
새누리당은 6일 예상대로 국회 본회의에서 국회법 개정안 재의 투표를 거부하며 ‘대통령의 심기’를 선택했습니다. 이틀 뒤 유승민 원내대표의 거취를 논의하는 의원총회를 열었습니다. 의총에서 사퇴권고가 결정되자, 유 원내대표는 즉시 기자회견을 열고 사퇴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사퇴의 변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다”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습니다. 지난 2008년 뜨거웠던 촛불이 떠올랐습니다. 대통령을 향한 메시지지요. “따뜻한 보수, 정의로운 보수의 길을 계속 가겠다”는 대목은 후속편을 기대하라는 말처럼 들리더군요.
대통령과 여당 원내대표의 갈등에서 많은 이들이 “원내대표가 버텨줬으면”하고 바랐습니다. 드라마에서 강자에 맞서는 상대적 약자인 주인공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곤 하는 것이지요. 이번 드라마는 강자의 뜻대로 된 모양새지만 결말이 ‘주인공에게 비극이었다’라고 말하는 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대통령의 분노 발언이 있었던 지난 달 25일부터 유 원내대표가 사퇴한 8일까지 회사 사진데스크에서 ‘유승민’을 키워드로 넣고 사진을 검색해 봤습니다. 370장의 마감된 사진이 검색 됐습니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 정치에 발을 담근 지난 16년 동안 마감된 그의 사진 중 지난 10여 일 동안 생산된 사진의 비중이 절반쯤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하튼 극적이라는 면에서 정치를 드라마라고 한다면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를 만들고 관리하는 정치인은 배우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 삶도 다분히 정치적이며 어느 순간 '나는 연기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자문할 때가 있습니다. ^^
yoonjo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