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발 사진 한 장이 주목을 받았습니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사진기자 때문에 그 메시지가 더 부각되었지요. 주인공은 시리아 한 매체의 사진기자 압둘 카디르 하바크입니다. 시리아 알레포에서 발생한 폭탄 테러 현장에서 오른손에 카메라를 손에 쥔 채로 부상당한 아이를 안고 달려 나오는 사진이었습니다.
일상적인 것이 그러하듯 시리아 테러가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특히 한국 언론의 관심에서는 더 멀지요. 그런 중에 현장의 위험을 무릅 쓴 사진기자의 정의로운 행동이 기록된 사진이 널리 공유되고 찬사를 받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리아의 참상이 이 피사체인 사진기자 덕에 드러나고 관심의 영역으로 잠시 들어왔습니다. 만약 구조대원이 아이를 안고 뛰어나왔다면 역시 일상성의 범주 안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씁쓸한 짐작도 해봅니다.
이 사진은 자연스럽게 사진가 케빈 카터의 ‘독수리와 소녀’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찍은 이 사진으로 그는 퓰리처상(1994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곧 ‘셔터를 누르기 전에 아이를 구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지요. 그는 얼마 뒤 자신의 차 안에서 자살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비난과 가책이 자살의 이유로 쉽게 연결되었지요. 공개된 그의 유서는 가난과 탐욕적 전쟁, 친구의 죽음 등이 긴 시간 그를 괴롭혀 왔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그 사진이 직접적인 또는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던 것이지요. 사실 그는 “사진을 찍은 뒤 소녀를 구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그와 그의 사진은 앞뒤 맥락이 다 생략된 채 ‘생명이냐 특종이냐’ ‘취재 윤리’ 등을 언급할 때 단골 소재로 등장합니다. 그는 속이 상하겠지만 한국 언론사 면접시험에서도 자주 묻는 단골 질문 중에 하나지요.
“당신이 케빈 카터였다면?”
카터의 다른 많은 작업들을 이해한다면 단순하게 물을 질문도 아니고 또 그렇게 답할 수도 없는 가혹한 질문이지요. 이 사진 한 장으로 전쟁으로 고통 받는 수단의 현실을 알렸고, 이후 더 많은 생명을 구하는 데 기여했을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무엇보다 목숨을 걸고 전장에 뛰어들 수 있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바크는 테러 현장에서 ‘피란민을 향한 잔인한 테러 사진을 찍어 전 세계에 알리는 것과 눈앞의 아이를 구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을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몸의 반응에 충실했던 겁니다. 카메라를 먼저 들었던 카터의 상황 역시 몸의 명령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 아닐까요. 하바크의 사진이 언론의 주목을 받았던 것은 그가 아이를 구한 행위 이상으로 카메라를 놓을 수 있었던 용기에 큰 점수를 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나라면 어땠을까?’
머리는 ‘생명이 우선이지’하고 명쾌하게 답을 합니다만, 급박한 순간에 제 몸은 어떤 명령에 충실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크고 작은 현장에서 때론 과감하게 카메라를 놓을 수 있는 용기, 카메라를 내려놓아야 할 때를 아는 지혜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그러한 시험에 들지 않았으면 더 좋겠습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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