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 딸아이는 잠이 많습니다. 토요일이면 어지간해 12시 전에 일어나는 일이 없습니다. 보통 낮 한두 시가 되어야 부스럭거리며 일어납니다. 지난 토요일 10시가 좀 넘은 시간에 눈 뜬 아이가 친구와 약속에 늦었다며 서두릅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날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 집회에 가기 전에 친구랑 피켓을 만들기로 했다더군요. 딸래미가 주말 ‘오전에’ ‘스스로’ 일어나는 것은 저희 집에서는 사건입니다.
집회에 다녀온 아이의 손에는 현장에서 만들었다는 피켓이 들려있었습니다. 가상 ‘한국사’ 국정교과서 표지에 낙서한 피켓이었지요. ‘한국사’ 글자 위에 덮어 쓴 문구가 재밌습니다. 초등학생 때 국어책에도 ‘국어’를 ‘꿇어’로 바꿔 써 놓았던 것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웹툰을 많이 봐서 다소 만화적인 표현을 즐겨 씁니다.
가부좌 틀고 생각에 잠긴 반가사유상에 박근혜 대통령을, 뭔가 지시를 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에 최순실을 덮어 그렸습니다. 선글라스를 머리에 얹어 쓴 최순실의 특징을 잘 잡아 표현했습니다. 손을 들어 “이제 하야해”라는 최순실, 앉은 채 ‘오케이’ 사인 보내며 “언니, 알겠어”라는 대통령. 대통령을 좌지우지한 최씨가 언니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간단한 그림에 표현된 관계와 메시지가 기발하고 명확합니다.
‘뭘 알겠나?’ 싶던 딸아이의 생각과 행동의 깊이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철없고 성질만 부릴 줄 아는 천상 중2라 생각했는데... 대견하네요. 나라가 이 지경이 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어른이자, 아빠로서 미안하기도 했습니다.
아침에 친구를 만나 만들었던 피켓에는 ‘이런 나라에서 공부하기 싫다’고 썼다더군요. 안 그래도 하기 싫은 공부, 확실한 핑계를 찾은 셈이지요. 이래저래 걱정입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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