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마을에 가서 한 잔 더 할래. 방 있으니까 거기서 자도 되고..."
해군기지 건설로 발파작업이 진행되면서 강정마을에 들어와 수 주 째 취재하고 있던 한겨레 선배가 서귀포의 한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제안했습니다. 총선 취재차 제주도에 왔다가 얼떨결에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지요. 한 번은 왔어야 하는 곳이라 생각했거든요. 사진기자는 소위 '현장'이라는 곳에 가지 못하고 있으면 어떤 불안 내지는 부채의식 같은 것을 느끼는 직업인가 봅니다.
어둠에 잠겨 더 고요해 보이는 마을 입구에 '황제호프'가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선배는 "치킨과 노가리 맛이 최고"라고 했지요.
안주로 노가리를 시켰습니다.
아담한 호프에 한 테이블은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활동가들이 차지했고, 또 한 테이블은 마을 주민 두어 명이 앉아 이런저런 얘기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습니다.
옆 테이블 어른신이 노가리를 기다리며 맥주를 홀짝이는 우리 테이블에 귤 두 개를 건네왔습니다. 한라봉이었나?
도시인의 조급함, 도시의 시간개념으로는 이해가 안되는 시간이 걸려 노가리 안주가 나왔습니다.
그 '시간'이 강정마을이라는 곳을 짐작케 하였습니다. '노가리'는 도시에서 먹던 말라 비틀어진 노가리가 아니었습니다. 퉁퉁한 노가리에 살점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이제껏 먹었던 노가리는 도대체 무엇이었나"라는 말을 뱉어내며 노가리를 씹었습니다. 그 맛도 사진도 보여줄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
주민이 건넨 귤과 살 많은 노가리는 강정마을의 인심과 풍성함을 얘기해 주는듯 했지요.
역시 제주는 바람의 섬이더군요.
바람소리를 들으며 늦게서야 잠이 들었습니다.
날이 밝아서야 강정마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방파제에 올랐습니다.
비바람에 나부끼는 '해군기지 결사반대' 깃발 뒤 구럼비 바위에는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몸을 제대로 가눌수 없을 정도의 거친 바람에도, 바람에 이는 큰 파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른 시간부터 공사는 진행됐습니다.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과 활동가들이 방파제 위에 만들고 그리고 세워놓은 흔적들 뒤로 보이는 바다가 을씨년스러웠습니다.
아래 사진은 잠을 잤던 펜션 베란다에서 내려다 본 풍광입니다.
구럼비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을 이 펜션에서 이제 보이는 것은 높은 펜스와 공사장 뿐입니다.
마을 도로를 따라 사람 키 서너 배 쯤 되는 펜스가 서 있었고 경찰들이 지켰습니다.
가만 보니 펜스에는 제주의 비경을 담은 사진들이 서너 걸음 간격으로 붙어 있었지요.
자연이 파괴되는 곳의 가림막에 나붙은 제주의 아름다움이라니.
경찰이 지키고 있는 펜스에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흔적이 남았습니다.
비바람 사납던 새벽에 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이 펜스를 뚫고 공사장으로 들어가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했습니다.
국회의원 선거라는 큰 이슈에 강정마을의 외침은 묻히고 떠밀려 그간 조용한 곳이 되어 버렸지요.
하지만 매일 발파와 목숨 건 반대시위와 승강이가 반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총선에 묻혀버린 강정마을을 총선 취재일정 때문에 서둘러 떠나야 했습니다.
제주 4.3 사건의 기념일이기도 한 이날 몰아쳤던 비바람은 '구럼비의 울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출장중 생각지 못한 기회를 주신 한겨레의 이정우 선배와 류우종 선배 그리고 사진가 노순택 선배께 감사드립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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