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다큐를 지난 토요일 지면에 내 보내고 찜찜한 뒤끝이 계속 되네요.
이번 다큐엔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고 있는 난민 얘기를 다루었습니다.
난민은 인종, 종교,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한 박해를 피해 한국에 온 사람들입니다.
책 <내 이름은 욤비>등 난민 관련 책을 두 권 읽고, 난민지원단체 간사의 권유로 논문도 하나 읽었습니다.
지면에서 8매 정도의 글로 전달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사진을 찍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자신의 나라를 등지고 온 난민들이라 신변의 위험은 늘 잠재되어 있는 것이지요.
카메라를 드는 것도 한참을 망설이고 머뭇거렸습니다.
난민을 돕는 단체를 통해 한 가족을 소개받았습니다.
코트디부아르 난민 마마두의 가족입니다.
부부와 두 아이가 서울 모처에서 넉넉하지 않은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빈손으로 갈 수 없어 조카의 작아진 옷들과 장난감 등을 가득 들고 갔습니다.
긴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가족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다시 찾았을 때 벽걸이용 가족사진을 액자에 담아 전달했습니다.
너무 선해 보이는 이 가족이 좋아하는 모습에 저도 참 좋았습니다.
가족사진 중 마마두의 얼굴이 조금 아웃포커스 된 사진을 보여주며 신문에 써도 되는지 물었고, 그는 흔쾌히 허락을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여러 차례 고맙다고 인사를 했습니다.
내가 그에게 보였던 모습은 그가 만에 하나 다큐로 인해 겪을 수 있는 위험에 대한 보상 내지는 보험이었나? 라고 제게 묻고 있는 중입니다. 옷과 사진을 챙겨가는 순간에 스스로 의심치 않았던 진정성이 신문 게재를 목적으로 했기에 거짓이었나? 라고 지금 묻고 있는 중입니다.
yoonjoong
<난민, 그들에게 한국은 '좋은 나라'인가>
마마두씨(40)는 난민이다. 2002년 사업차 한국에 체류 중이던 그는 고국인 코트디부아르의 내전으로 귀국하지 못하다 상황이 진정된 2005년 돌아갔다. 사업 재개를 위해 친구들을 만나던 중 정권 와해를 위한 활동으로 오인한 친정권파 군인들의 습격을 받았다. 반정부 모임과 시위를 조직했던 전력 때문이다. 마마두씨는 한국으로 피신해 출입국관리사무소 난민실에 난민 인정 신청을 냈다. 4년이 지난 2009년 법무부로부터 불허 통지를 받았다. 이의신청과 행정소송으로도 난민 인정을 받지 못했다. 긴 난민 심사기간 동안 생계지원도 없고 합법적인 직업도 가질 수 없는 고난과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마마두씨는 2012년 아들의 수술과 치료 등의 이유로 ‘인도적 체류’가 허용됐다. “한국의 자유”가 좋다는 그는 불안정한 아르바이트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니제르에서 온 난민여성 루카야씨(37)는 아이를 안고 난민지원단체 ‘피난처’에서 운영하는 난민공동체학교를 찾았다. 매주 토요일 성인 난민을 위한 요리교실과 한국어교실이 열리는 곳이다. 그녀는 반죽 위에 쪽파와 해물을 얹어 해물파전을 구웠다. 입맛에 맞는지 파전에 쉴 새 없이 손이 갔다. 이어지는 한국어교실. 루카야씨가 교사의 선창에 “가나다라...”를 따라했다. 돌 지난 딸이 옆에서 “다다다다”하고 엄마 흉내를 냈다. 새로 배운 단어를 곧잘 따라 읽는 그녀에게 교사가 엄지손가락을 내밀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먼 이국땅의 고단한 일상에서 공동체학교의 수업은 위로가 되고 있었다.
음악교실에서 만난 자비(9)는 난민부모를 둔 아이다. 자비는 또래와 장난을 치다가도 금세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곤 했다. 한국어를 국어처럼 쓰는 자비의 국적은 말리다. 하지만 자비는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국인”이라고 했다. 국적을 가진 자비와 달리 상당수의 난민아동은 부모가 박해가능성 등의 이유로 자국 대사관에 출생등록을 하지 못해 무국적 상태로 살고 있다.
난민은 인종, 종교, 정치적 이유 등으로 인한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이다. 우리나라는 1992년 난민협약에 가입했지만 고시합격보다 어렵다고 할 정도로 난민 인정에 인색하다. 난민 신청자 5485명(2013년 5월말 기준) 중 난민 인정자가 329명, 인도적 체류가 173명, 불인정이 2550명이다. 매년 1000여 명 정도가 난민 신청을 하고 있다.
‘피난처’의 난민숙소이자 커뮤니티 ‘라이트하우스’의 집들이 날. 6년이 걸려 난민 인정을 받은 콩고민주공화국 출신 욤비 토나(46)씨가 초대받은 이들 앞에서 난민을 얘기했다. “한국 사람들 1950년(한국전쟁)에 난민이었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도 난민이었어요. 우리나라(콩고) 괜찮아지면 다시 갈 거예요. 콩고에서 누가 물어보면 한국이 “감옥이었어요”라고 말하면 안 되잖아요. 좋은 나라 기억 남기세요. 누구나 언제든 난민이 될 수 있어요.”
사진·글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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