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하고 발품 팔아 게재한 ‘다큐’에 애착이 더한 건 말해야 무엇 하겠습니까. 그간 장애인, 이주노동자, 동성애자 등 주로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만 다큐가 결국 바라는 것은 조그만 변화입니다. 오랜 세월 익숙하고 공고했던 틀이 단숨에 깨지거나 꺾이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단단한 벽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넓은 강에 작은 돌다리라도 하나 놓고 있다’면서 감지되지 않는 변화에 그리 자위하곤 합니다.
이번엔 겨울을 앞둔 철거민을 만났습니다. 개발지역에서 만난 철거민들은 저를 보자마자 자신들의 억울한 사연을 토해 냈습니다. 목소리는 금세 젖어들었고 눈시울은 붉어졌습니다. 그리고 얘기 끝에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습니다. “들어줘서 고맙다. 말하고 나니 속이 좀 후련해진다”고. 들어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된다고 했지만, 언제 강제철거가 집행될 지 모르는 철거민의 긴장과 불안이 제게 보내는 메시지는 기사를 통한 현 상황의 ‘변화’였습니다. 부담스러웠습니다. 예의 그 ‘익숙하고 공고한 틀’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기사가 나간 뒤 소심하게 문자를 보냈더니, 한 철거민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데 다뤄줘서 고맙습니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목소리에 살짝 물기가 어려 있었습니다.
일하다보면 속이 좁은 건 늘 접니다.
<떠날 수 없는데 떠나야 한다 '철거민'이라는 죄로>
“이번 겨울은 날 수 있을까요?”
개발지역 내에서 만난 철거민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물었다.
눈발이 흩날리고 추위가 기승을 부린 지난 11월27일. 경기 하남시 풍산동 하남미사택지개발지구에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날이 저물자 거대하고 캄캄한 공사장에 불 밝힌 비닐집 한 동이 섬처럼 떠올랐다. 23년간 소규모 농사를 지으며 김치와 장류를 팔아온 이구선씨(65)의 집이다. 이웃인 이준봉씨(52)와 양금선씨(62)는 각각 섬유공장과 비닐집이 강제철거 된 뒤 터무니없는 보상금으로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이씨의 비닐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용역들이 감시해요. 무서워 잠을 못 잡니다. 밤새 누가 불을 지를까, 포클레인으로 눌러버릴까···” 세 여성 철거민의 두려움과 걱정이 한숨이 돼 집안 차가운 공기 속에 섞였다. 생계대책을 위한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데 돌아오는 것은 고발과 감시, 그리고 ‘법대로 하라’는 으름장이었다. 비닐집 바로 앞에는 임박한 철거를 예고하듯 위협적인 포클레인이 벌써 몇 일째 서 있었다.
같은 날 재개발지역인 서울 종로구 돈의문 1구역. 골목을 따라 사람들이 떠난 집들은 반쯤 부서진 채 흉물이 되었고 그 사이로 찬바람이 불어댔다. 골목 안 권계란 할머니(85)의 허름한 집은 3평쯤 돼 보였다. “못 가요. 이 추운데 어디로 가요. 돈도 없고 못 가요” 홀로 사는 권 할머니는 불편한 다리를 연방 주무르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할머니 곁에는 집을 당일까지 비워달라는 부동산 인도 강제 집행 예고장이 놓여 있었다.
닷새 후인 12월2일. “지금 용역들이 집을 둘러쌌어요.” 이준봉씨의 다급한 목소리가 휴대폰에서 흘러나왔다.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으로 강제철거가 진행되고 있었다. 용역업체 직원들이 둘러싸 철거민들의 접근을 막았고 들려나온 살림살이가 트럭에 실렸다. 이어 포클레인이 큰 바가지를 휘두르자 비닐집은 무기력하게 허물어졌다. 23년의 삶이 불과 몇 분 만에 사라지고 맨땅이 드러났다. 망연히 바라보는 나이든 철거민 옆에서 앳된 용역 직원들이 잡담하며 웃었다. 용역과 집행담당자들이 떠나자 철거민들은 버려진 세간들 사이에서 다시 쓸 물건을 챙겼다. 쫓겨난 이들은 그저 긴 한숨만 내질렀다.
전국철거민협의회 이호승 상임대표(56)는 “매년 전국적으로 2500여 곳이 개발되고 수백 곳의 강제철거 현장에서 반인권적이고 반인격적인 사태가 발생하고 있다”며 “철거민의 현실적인 생계대책과 이주대책이 보장돼야 한다”고 말했다.
철거민들에게 서럽고도 잔인한 겨울이 찾아왔다.
사진·글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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