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맛비가 내렸습니다. 일부 지역엔 제법 큰 비가 내렸지만 서울에는 고만고만하게 내렸습니다. 블로그에서 두어 번 썼는데 비에도 성격과 각기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내리는 이 비는 어떤 비일까?’가 비 스케치의 미션을 받은 자의 첫 질문이어야 합니다.
비는 애매했습니다. 장마기간에도 변변한 비가 내리지 않아서 인지 가물었던 대지에 내리는 비는 반길 만 한 것이지요. 호우특보가 내린 일부 지역은 마냥 반가울 순 없겠지요. 게다가 태풍까지 북상한다고 하니 비의 색깔을 판단하기 애매했습니다.
강이 불어 위험하다느니 축대가 무너졌다느니 하는 돌발 현장이 없어 일단 비를 사건·사고가 아닌 서정적 시선으로 기록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차창에 맺힌 빗방울을 걸고 행인을 찍어봅니다. 이렇게 찍어서 참 근사하게 표현된 사진을 보긴 했는데 그런 느낌으로 담기지 않더군요.
회사에서 가까운 세종로 사거리 일대를 수차례 지나며 반복해 시도했으나 흡족할 만한 빗방울 사진을 건지지 못했습니다. 광화문으로 향하다 왼쪽 인왕산 허리에 걸린 구름 한 자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구름은 경복궁 뒤로 흘러들어가고 있었지요. ‘고궁과 낮게 걸린 비구름이라.’
생각지도 않았던 경복궁 경내로 들어간 것은 순전히 구름 때문이었지요. 여전한 메르스 여파인지 관람객이 많지 않아 조용했습니다. 조용히 비에 젖은 고궁은 운치가 있더군요. 방학을 맞은 아이들이 수첩을 손에 쥐고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궁을 둘러봤습니다.
근정전 내부를 슬쩍 들여다 본 아이들이 높은 처마 아래에 섰습니다. 빗물이 모여 떨어지는 처마 밑에서 아이들은 신기해했습니다. “투두둑~” 굵은 빗물이 우산에 내려 부딪히는 리듬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왠지 익숙해 보이는 장면이었지요. 어릴 적 기억을 더듬었습니다. 저 아이들처럼 어느 처마 밑에 서서 빗물을 우산으로 막기도 하고 입을 벌려 받아먹기도 했던 장면들이 아련한 영상으로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들의 사진에 ‘비의 서정’이 잘 표현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조선 왕실의 상징적 공간, '근정전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이라는 것은 신비하고 낭만적이기까지 합니다.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흥례문을 걸어 나오는데 입구를 지키는 나이 지긋한 분이 대뜸 “뭐 찍었어요? 어디 기자예요?”하고 묻습니다. 자기 눈은 속일 수 없다는 듯 말이지요. “유료입장 때는 걸러졌는데...” 제가 뭐 어디 몹쓸 건더기나 찌꺼깁니까. 메르스 영향으로 7월 한 달은 무료 개방입니다. 보통 사진기자들은 이곳에서 표 대신 명함을 주고 취재합니다. 누가 무엇을 취재하는 지 체크하는 것이지요. 심지어 표를 끊어도 명함을 달라고 합니다.
여하튼 기분이 격하게 더러워졌습니다. 치미는 화를 꾹 눌러 잘 참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렵게 살려놓은 동심을 한 어른이 참 간단히 짓밟아 버렸습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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