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선배와 사진다큐 회의를 했습니다. 보통 그렇지만 회의는 막연한 가운데 시작합니다. 막연함이야말로 회의의 조건인 셈이지요. 정동길의 어느 한적한 아지트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말들을 나눕니다. 적당한 조바심에 한숨도 더해 지곤합니다.
막연함을 떨쳐내지 못한 채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며 회의 장소를 나서다 배롱나무 낙엽 앞에 멈췄습니다. 낙엽을 주웠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니 특유의 모양과 다양한 색의 변화가 보였습니다. 같은 나무에서 떨어졌다고 뭉뚱그려 ‘무슨 나무의 낙엽’으로 불리기엔 이파리마다 개별성을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회의 중에도 ‘단풍으로 할 수 있는게 없을까’하는 얘기는 있었지만, 역시 막연했지요. 고개들고 걷다보면 그냥 밟고 지났을 것을, 회의에 한마디 나왔다고 낙엽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지요. ‘뭔가 될 것 같다.’
정동길을 걸으며 낙엽을 주웠습니다. 단풍과 은행나무 정도 아는 수준으로 말이지요. 줍고, 찍고, 묻고, 찾아가며 이파리가 떨어져 나온 나무의 이름을 적어넣었습니다. 벚꽃, 라일락처럼 절정의 꽃에만 주목했던 걸 반성하게 되더군요. 가을낙엽에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쓸쓸함이 있고, 흔히 말하는 삶의 여러 지점들과 만난다는 것도 새삼 새겼습니다. 낙엽이 어쩌면 나무의 절정일지도 모르지요.
낙엽을 한 움큼 주워들고 바닥을 보며 걷는 중년 남자 둘을 지나는 이들이 힐끔거렸습니다. ‘뭐하려고 저럴까’ 싶었겠지요. ‘다큐하겠지’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더이상 낙엽을 주울 일이 없어진 직장인들이 기억 속 낙엽 줍던 어느 날을 떠올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열여섯 종의 낙엽을 사무실로 들고 들어와 신문지 위에 펼쳐놓았습니다. 이름을 비교하며 순서대로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지요. 신문 위에 놓인 낙엽도 그림이 꽤 좋았습니다. 사진을 한 장 찍었습니다. 놀라운 건 낙엽을 이고 있는 지면에 ‘서울식물원’ 기사가 딱. 다큐의 필연성을 확신하게 되었지요. ^^
다큐를 시작하고 마감하는 내내 낙엽은 신문지 위에서 말라갔습니다. 사무실 통로에 놓인 낙엽을 지나가며 본 선후배들이 관심을 보였습니다. ‘왜 가져다 놓았는지?’ ‘낙엽이 어떤 다큐로 나올지?’ 이런 것도 이번 다큐에 의미를 보탰습니다. 낙엽 뒤에 플래시를 비춰 색과 모양이 더 도드라지게 한 뒤 접사렌즈를 이용해 하나씩 찍었습니다.
J선배는 다큐 글에서 말라가는 낙엽을 ‘연탄불 위의 오징어’ 같은 감각적 표현을 구사하기도 했지요. 가까이서 지켜본 자만이 쓸 수 있는 표현이겠지요. ㅎㅎ '이제 치워야지' 했는데 J선배는 편집된 지면을 미리 출력해 낙엽 위에 붙여놓았습니다. ‘지나며 보던 낙엽이 이런 다큐가 되었습니다’라는 것이지요.
좀 과장해 이번 다큐는 "‘설치미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고 평가합니다. ^^ 동료들과 과정을 공유한 것도 즐거움이었고요.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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