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순간을 그냥 지나쳤다면…’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습니다.
추석을 앞두고 5일장을 취재했습니다. 여러 차례 찍었던 현장이지만, 그런 이유로 부담입니다. 보던 사진이 아닌 것을 찾고 싶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번 추석은 좀 특별했습니다. 코로나로 고향방문을 자제해달라는 게 정부의 공식적인 요청이었지요. ‘코로나 시대, 명절을 앞둔 5일장’이 취재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느낌은 알겠는데 사진으로 표현이 잘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예년의 느낌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진에 그저 사진설명으로 우길 수밖에 없는 상황도 염두에 두었습니다.
지난달 28일 전남 구례군에서는 구례5일장이 열렸습니다. 새벽에 장터를 한 바퀴 돌고 숙소에 들어왔다가 다시 숙소를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취재차량이 숙소 앞 삼거리에서 신호에 걸렸습니다. 우연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고, 한 장면을 만났습니다. 장을 본 식재료를 삼륜자전거에 가득 실은 할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찍을까 말까’를 망설였습니다. 눈에 든 장면이지만, 그렇다고 그리 특별하진 않았습니다. 배가 많이 고팠고, 긴 하루를 위해 서둘러 밥을 먹고 싶었습니다.
신호가 바뀌었고 차가 움직일 때 급히 마음을 바꿨습니다. 할머니의 자전거 뒤를 밟았습니다. 한두 컷만 찍자고 한 것이 할머니의 집 앞까지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인사를 드리고 잠깐 얘기도 나눴습니다. 할머니가 사는 마을은 지난 8월 폭우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마을 중 한 곳이었습니다. 마을길을 걸어 나오며 사진 속 ‘늙은 어머니의 뒷모습’에 수해와 코로나로 달라진 추석이라는 의미도 같이 욱여넣었습니다. 이번 출장 중 찍은 사진 가운데 '다른 추석'이 그나마 표현된 사진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신문 1면에 실렸습니다.
결과로 하는 얘기지만, 처음 할머니를 본 순간에 차에서 내려서 따라가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나, 싶습니다. 정확히 그 시간에 숙소를 빠져나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 했나, 차가 신호에 걸리지 않았으면 또 어쩔 뻔 했나, 차 안에서 습관처럼 휴대폰을 들여다봤으면 어쩔 뻔 했나…. 꼬리를 무는 ‘어쩔 뻔 했나’로 가슴을 쓸면서, ‘나는 왜 그렇게 움직이게 됐을까’를 곰곰이 되짚었습니다.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바로 ‘안개’였습니다. 이른 아침에 섬진강과 지리산이 만들어놓은 짙은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안개가 없었다면 할머니의 자전거를 따라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진기자로 살며 ‘찍을까 말까’의 많은 순간에 대체로 ‘말자’를 선택해왔던 것 같다는 반성의 시간을 잠시 가졌습니다. 내 삶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바로 그 순간’을 얼마나 자주 흘려보냈을까 싶기도 합니다. 뭐, 하지 않은 것조차도 나름 선택이지요. 지나간 선택의 후회와 앞으로 선택할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살아가게 하는 여러가지 힘들 중에 하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 오랜만에 만난 이들이 저를 보고 얼굴이 좋아졌다고들 합니다. 얼굴 하얘졌다고, 심지어 피부가 고와졌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ㅎㅎ 내근을 하다 보니 얼굴이 창백해졌습니다. ‘하얀 사진기자’는 참 어울리지 않습니다. 게으름을 질타하는 말로 느껴지기도 하지요. 오랜만에 출장을 떠나 장돌뱅이처럼 장터를 돌았습니다. 지난여름 얼굴에 쬔 햇볕의 총량보다 많은 양의 볕에 노출됐던 것 같습니다.
허옇게 떴던 얼굴이 조금 타서 돌아왔습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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