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인라인 경향'이라는 곳에 올렸던 글인데요.
친구가 퍼서 올린 걸 다시 퍼왔습니다.
이후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공교롭게도 아래 등장인물들 요즘 보기 힘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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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윤중이 글이 있어 올려본다. 윤중아 마이 컷다...^^
<다시 보는 3당 대표의 룸살롱 현장>
그날밤 서초동에는 무슨일이 있었던걸까.
안녕하세요. 사진부 강윤중 기자입니다. 사진기자 생활 4년째구요. 현장의 사진기자 얘기를 하고 싶어 글을 올립니다. 한 사건의 취재 현장 얘기로 사진기자를 말하기는 불가능합니다만 `이런 현장에선, 이렇게 일합니다` 정도는 보여줄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대통령직 못해먹겠다" 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으로 떠들썩했던 21일 밤. 소환을 앞두고 쓰러진 김홍일 의원이 입원한 서울 대방동 성애병원 앞. 병실 밖 스케치를 끝내고 본사로 사진을 전송한 후 담배 한대를 피워 물고 있을 때,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부서 선배 전화였습니다.
“윤중아, 옆에 누구 있나?“
`앗! 큰 건이구나`. 선배 목소리의 뉘앙스만으로도 취재건의 경중을 알아차릴 수 있는 4년차가 아닙니까. 심장이 슬슬 고동치기 시작하는 순간이지요. 이럴 땐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합니다.
“서초동으로 가라. 청와대 만찬을 끝낸 여야 3당 대표들이 서초동 룸살롱에 있다니까…“
밤 9시30분쯤 내리 서초동으로 달려갔습니다.
현장에 가면 알 수 있는 상황임에도 가는 내내 머릿 속은 복잡하게 돌아갔습니다. 늦은 시간까지 같이 모여 무슨 얘기를 하나? 나라가 시끄러운데 하필이면 이런 날 룸살롱을? 술마시는 모습을 담는 건 불가능하겠지? 미친 척하고 뛰어들어? 아니, 나오는 모습만이라도 찍을 수 있으면 그게 어디야? 이도 저도 안되면 건물 전경 사진이라도…. 직업병이죠. ^^
어느덧 서초동 ㅈ룸살롱. 황태자 김현철씨와 김홍업씨가 한때 애용한 곳이랍니다.
밤 9시50분. 각 당 대표와 비서실장의 운전기사들이 깜깜한 골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문사 차량 한 두 대가 골목으로 들어서더니 어느새 기자의 출현이 보고가 됐는지 비밀스레 움직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습니다.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당직자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으니, “들어가서 뭐 하시게요?“
“대표들 안에 계시나요?“
“모르겠는데요. 저도 못 들어가요"
이렇게 작은 전쟁은 시작됐습니다.
철저하게 회원제로 운영하는 업소라 그런지, 룸살롱 앞 출입문 등 모든 출입구가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안의 상황이 어떤 지도 알 수 없고, 이들이 언제 나올지도 모른 채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대표들의 차량 움직임으로 짐작만 할 뿐이지요.
'오늘 일 길어지는구나!'. 결국 뻗치기 자세로 돌입했습니다('뻗치기'라 함은 기자들 사이의 은어로 무작정 버티고 기다려 소기의 취재 목적을 달성하는, 고도의 집념과 투지를 필요로 하는 취재 기법입니다. )
'혹 정문이 아닌 문으로 나간다면? 설마 높으신 양반들이 뒷구멍이나 쪽문으로 나갈려구? 그래도 모르지. 마감시간 전에는 나올까? 마감시간의 개념을 아는 양반들이라 아예 늦게 나오면 이 밤에 무슨 날고생이람'
마감시간이 다가오면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순간, 김종필 총재의 차량이 지하주차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몰래 주차장으로 따라내려갔습니다. 운전기사와 눈이 마주치고 가벼운 눈싸움. 차량이 다시 나갑니다. '앗! 속았다'
다시 나와 건물 이리 저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동안에도 건물 안팎에선 이런 저런 비밀스런 신호들이 오갔습니다. 한 대표의 운전기사에게 슬며시 다가가 건물 전경을 찍으며, “이제 나오실 때 됐죠?"라고 넌지시 물었습니다.
“모르겠는데요. (카메라를 보며) 디지털이에요?“
“예. 보실래요?“
“이야, 잘 나오네요“
뭐, 이런 영양가 없는 얘기들이 오갑니다. 밤 11시가 좀 넘은 시간. 어디들 있다 오는지, 기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사진기자도 4명으로 늘었습니다. 이미 한 시간 이상 기다린 저는 본전 생각이 안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집니다. 혼자 감당해야 할 긴장감을 나눌 수 있으니까. 점점 가까워지는 마감시간.
초조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0여분이 지났을까. 황태자 클럽의 출입문이 열리더니 한 떼의 무리가 쏟아져나왔습니다. 급히 자리를 잡는데 선두에 선 민주당 이낙연 비서실장이 술기운 가득 머금은 미소를 흘리며, “에이, 왜들 이러세요?“
이런 술자리까지 취재하느냐는 투지요. 카메라를 가리는 손들을 피해 뒤쪽으로 김종필 총재와 정대철 대표를 볼 수 있었습니다. 김종필 총재는 기자들의 질문에 “아주 기분 좋다“라는 말만을 남기고 휘청거리며 차에 올랐습니다. 김 총재 뒤로 정 대표가 한 앵글에 들어왔습니다.
취재의 가능성조차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화장실 나올 때 생각 달라진다고 끝간데 모를 이 놈의 욕심이여. '김 총재, 정 대표 뒤로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와 유인태 수석까지 나란히 있었으면…'
박 대표와 유 수석은 기자들의 출현을 알고 일찌감치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김 총재가 떠난 뒤 정 대표는 취재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었습니다. 룸살롱 앞 인터뷰. 썩 재미있는 광경이지요.
노트북을 열어 사진을 전송한 시간은 밤 11시45분. 그렇게 한판의 작은 전쟁이 끝났습니다. 내일 신문을 읽을 독자들의 반응이 내심 궁금해지면서 또 다른 설렘과 함께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빠를 반기는 15개월 된 딸아이의 웃음이 그날 따라 어찌나 예쁘고 사랑스럽던지.
2003년 05월 30일11:24 (강 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