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미안하다, 병아리들아~!

나이스가이V 2004. 10. 6. 18:25

창간일이 다가오면 사진부에서는 창간 사진기획물을 준비합니다.
2주전부터 아이디어를 모으고 그 중에 몇 꼭지를 준비하죠.

사진의 질도 중요하지만 내포한 의미를 잘 표현해야 합니다.
신문사의 각오나 비전을 담은 사진이라면 더 좋죠.
물론 설명과 어우러져야 하지만.
기존 작품 중엔 '비온뒤의 무지개' '쭉 뻗은 대나무' '바위 뚫고 자란 소나무'
이런 것들이 있죠. 대충아시겠죠?

이번에 제가 찍은 사진은요.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였죠.
아이디어는 위에서 주셨구요. 섭외 및 취재는 제가 했죠.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닭가공'ㅎ'업체가 있는 전북 익산시의 한 부화장에 갔습니다.

하루에도 수십만 마리의 병아리들이 태어나고 있는 곳이죠.
온도와 습도 등 적절한 환경이 갖춰진 큰 부화기가 여러 수십개.
업소용 냉장고 같이 생긴 부화기를 여니, 
수천마리의 병아리들이 깨어나오고 있었죠.

양해를 구해 밖으로 막 깨고 나오려는 놈으로 한 판을 가져나왔습니다.
자리를 잡고 병아리들이 나오길 기다렸습니다. 머릿속으로 알을 깨는 모습을
그리고 있었던 저는 당황했습니다. 부리로 쪼아서 얼굴을 들이밀고 나오는게
아니더군요. 부리부터 나오는 줄 알았었지요.

부리로 알을 깨기 시작한 놈을 들어 보았습니다. 깨진 조그만
구멍사이로 "삐약삐약"하는 울음소리가 새나오더군요. 숙연해졌습니다.
"환경이 맞지 않아 여기서 깨어나오는 병아리들은 다 죽는다"는 직원의 말에
뜨끔했습니다. 병아리에 대한 미안함이죠.

알을 깨고 나와 젖은 몸으로 비틀거리다,
이내, 우리가 알고 있는 병아리의 모습으로 삐약되며 휘젓고 다니죠.

어차피 사람 뱃속으로 들어갈거라지만, 깨고 나오는 순간, 생명 탄생의
순간을 쭉 지켜본 저는 경외감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앞으론 닭은 절대 못 먹을거 같다'고 생각했죠.

촬영 후 병아리들을 팽개치고 왔는데, 오는 길에도 병아리들 모습이 아른 거리면서,
병아리한테 세게 당하는 꿈을 꿀것 같다는 생각이.

결국, 창간호에 사진을 쓰지 못했지요.
'미안하다, 병아리들아' 
신문에 쓰기라도 했으면 덜 했을텐데...

다음날, 삼계탕 먹었습니다. 








이놈은 나오자마자 저를 봤으니, 제가 엄만줄 알았을 겁니다.



'사진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메라폰 든 사진기자  (9) 2004.10.20
신문사진 편집의 묘미(?)  (3) 2004.10.11
'샤라포바'를 봐야하는게 일이다.  (16) 2004.09.30
경찰헬기를 타고...  (9) 2004.09.29
웃음으로 시작해...몸싸움까지.  (2) 200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