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다큐

사진은 문장만큼 명확할 수 있는가

나이스가이V 2022. 3. 21. 12:22

꿀잠 후원자 이름 새김판

꿀잠이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있다는 소식을 지난해에 들었습니다. 사진다큐라는 형식으로 한 번 다뤄야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타이밍을 잡지 못했습니다. 구차한 핑계지만, 다른 언론사에서 같은 형식으로 먼저 다뤘고, 딱 고맘때가 제가 조금 긴 호흡의 다큐를 취재할 상황이 아니었지요. 지나고 나서야 어디서 먼저 다루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고, 굳이 하려고 했다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싶은 것이지요. 결국 의지의 문제였다는 결론을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이거다 싶은 소재가 떠오르면 다른 소재로 전환이 잘 안 됩니다. 꿀잠이 그러했습니다. 유연하지 못한 것도 이유지만, 비정규노동자의 집이자 쉼터인 이곳을 짓는 과정부터 사진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후원한 기금으로 낡은 주택을 매입했고, 공사비를 아끼기 위해 노동자, 예술인, 종교인 등이 철거와 리모델링에 재능과 땀을 기부했습니다. 취재하러 갔다가 저 역시 땀을 보탠 1인이 되었습니다. 2017년 지어져 지난 5년 간 참 많은 이들이 위안과 힘을 얻었습니다. 의미 있는 사업들도 자리를 잡았습니다.

 

나의 다큐취재 순번이 돌아올 때까지 다른 아이템이 없다면 꿀잠으로 하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미 꿀잠으로 굳어진 상태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누군가 또 꿀잠이냐?’고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더 강력하고 확실한 아이템에 대한 여지를 열어두었던 것 같습니다.

 

 

[포토다큐] 서럽고 힘들어도 ‘꿀잠’ 만나 큰 힘을 얻었어요

“직장의 횡포로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섰다가 ‘꿀잠’을 만나 큰 힘을 얻었습니다.” 복직을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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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앞에 꿀잠의 바람은 사업을 그 자리에서 그대로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존치입니다. 보상을 받는다 해도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지금과 같이 교통과 시내 접근성이 좋은 공간을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는 존치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판단해 존치에 준하는 이전 계획을 수립해 달라고 조합과 구청 등에 요청을 했습니다. 비슷한 조건에서 사업을 중단 없이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죠.

 

카메라를 들고 꿀잠을 들락거렸습니다. 몇 달 전에 한겨레와 시사인의 후배 사진기자들이 위기의 꿀잠을 다뤘습니다. 후배들의 사진을 봐버린 이상 그 이미지의 잔상들이 남아 괴롭더군요. 다르게 찍어야지 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후배들의 사진이 또렷하게 떠올랐습니다. SOS가 써진 옥상에서 촛불을 들고 선 노동자들, 꿀잠을 지켜달라는 손팻말을 든 활동가들의 드론 사진이 어른거렸습니다.

 

사실 위기라는 상태를 드러내는 이미지를 포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문장으로는 백 번 천 번 쓸 수 있지만 사진으로 지금 당장의 위기를 표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앞서 두 후배가 앵글 안에 글씨를 드러낸 방식은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메인사진은 직관적이지 않고, 비유적일지라도 글의 도움 없이 가야한다고 방향을 정했습니다.

취재 마지막 날 찍은 사진 두 장은 그 방향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메인 사진 후보로 고른 사진들입니다. 하나는 해지고 어두운 꿀잠 옥상 휴게실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해고노동자의 모습입니다. 꿀잠 주변 재개발이 예정된 신길동의 어둠과 아파트 불빛이 가득한 원경의 대비를 고려했습니다. 휴대폰 불빛에 구조와 연대의 요청이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다른 한 장은 꿀잠을 짓는데 앞장 선 두 어른고 백기완 선생과 문정현 신부가 함께 길을 걸어가는 그림 액자에 비친 노동자의 모습입니다. 계단에 걸려 있는 액자의 한쪽 부분에 오후 햇살이 들어오는 창틀 모양의 새겨졌고, 꿀잠을 찾은 이가 지나가는 실루엣을 노려서 찍은 것이지요. 그림의 제목은 <동행>이었고, 꿀잠의 존재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진을 다루면서 자주 하는 질문은 가령 이런 겁니다. ‘재개발로 꿀잠이 위기에 빠졌다라는 명확한 문장만큼의 사진이라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것일까. 가능하지 않다면 내가 이제껏 해왔던 수많은 다큐는 사진적 접근이 아니라 글에 딸린 부수적 사진을 구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싶기도 한 것이죠.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202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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