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범신의 소설 <소금>의 무대 논산과 강경을 다녀왔습니다. ‘경향신문 창간 70주년, 70인과의 동행'의 탐방지였지요. 회사 창간기획 행사에 무한애정으로 참가하고 있는 아내의 ‘지시’로 출장에 앞서 소설을 읽었습니다. 읽고 가면 뭔가 맥을 짚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암시를 하면서 말이지요.
논산으로 향하는 길에 문득 소설을 떠올리려니 주인공 이름부터 가물거렸습니다. 책에 수십 번은 반복됐을 이름인데 ‘나이 탓인가?’했지요. "재밌게 잘 읽었다"며 덮었던 책인데 어떻게 그렇게 깨끗이 지워질 수 있는지.
강경 옥녀봉에서 박범신 작가를 만나고 탐방 코스를 돌며 소설에 묘사됐던 지점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소설 속 막연했던 장면이 구체적인 모습을 띄니 하얗게 지워졌던 인물부터 내용까지 조금씩 되살아났습니다. 그나마 ‘예습’이 없었다면 무감하게 지나치거나 영혼없는 셔터를 눌렀을 장면들이었겠지요.
옥녀봉에서는 금강이 내려다보였습니다. 작가가 이 풍광을 묘사했었지요.
“옥녀봉은 높지 않은 암산이지만, 서북으로는 휘돌아가는 강에 발을 대고 동남간으로는 너른 벌판을 사이에 둔 채 계룡의 준령들과 대둔산에 뻗대어 있어, 그곳에서 보는 정경은 모난 데 없이 늘 원만하고 풍요로웠다. 옥녀봉 아래는 강경포의 전성기에 수많은 상선들과 어선들이 들어와 짐을 내리고 싣던 국제적 관문이기도 했던 곳이다(63쪽).”
그저 밋밋한 사진 한 장을 찍었습니다만, 그 안에는 한때 잘 나가던 포구의 모습, 소설 속 인물들의 발걸음과 시선이 녹아있다고 우기렵니다.
소설 속 ‘옥녀봉 꼭대기 소금집’의 배경이 됐다는 슬레이트 지붕의 허름한 집도 흐릿해진 내용을 살려내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인공 선명우가 가출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집이지요. 그가 기타 치고 노래하는 자유의 공간이며, 소설 내 화자인 ‘나’가 그를 만나는 곳이며, 소설 마지막 부분 ‘나’가 선명우를 찾아나선 딸 시우를 다시 만나게 되는 장소였지요. 장면이 하나씩 복기되었습니다.
“옥녀봉 북동쪽 맨 위에 그 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북으로는 배수 펌프장 어둔 지붕 너머로 논산천이 금강 본류와 합쳐지는 정경이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였고 동쪽으로는 성동면 너른 벌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계룡의 연봉들은 윤곽만 우뚝했다.....마당 끝으로 말라붙은 도라지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서쪽은 살림방인 거 같았고, 동쪽은 소금 창고였다....바닥엔 멍석이 깔려 있었고, 한쪽에선 파전을 구워내고 있었으며, 막걸리병과 양재기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65쪽).”
소설에 다소 낭만적으로 표현된 것에 비하면 다소 실망스런 모습이었지만 소설의 핵심적 공간이었다는 데 위안을 얻습니다. 작가가 이곳에서 내려다 본 풍광을 소설 속에 그대로 담았으리라 짐작했습니다.
배롱나무가 눈에 들어온 것도 순전히 책 때문이었지요. 작가가 책 전반부에 배롱나무에 대해 길게 표현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제대로 본적도 없고, 봐도 지나쳤을 배롱나무가 시선을 붙들었지요. 글 속 ‘나’와 시우의 첫 만남이 한 폐교의 배롱나무 앞이었습니다. 박 작가의 논산 집필실 앞마당과 답사지 돈암서원 마당에서 “꽃은 물론 그 줄기도 남달라 예로부터 선비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16쪽)”는 그 나무를 볼 수 있었습니다.
“보는 이 없는 폐교의 운동장을 여름 내내 지키고 있었을 배롱나무였다. 꽃잎들이 하롱하롱 지고 있었다....밑동에서 쌍으로 나눠진 두 가지가 밀어내듯 서로 멀어지다가 되구부러져 돌아와 스치는 형국으로 만나면서 여러 잔가지로 나누어 자랐다..... 균형 잡힌 좌우대칭이 미학적 전형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그 위에서 수많은 꽃이 막 떠오르는 우주선처럼 장중한 타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것은 태양의 광채를 품은 비의적인 영원성을 아낌없이 내게 보여주었다(18쪽).”
꽃이 흐드러진 배롱나무를 보니 괜히 반가웠습니다.
금강과 낡은 집과 배롱나무 세 장면으로 소설<소금>의 내용을 기억 속에 어느정도 되돌려놓았습니다. 결국 기억은 시간과 함께 사라지겠지만 적어도 이 세 장면은 기억에 남지 않겠나 싶습니다.
이 장면들과 더불어 ‘매력적인 이야기꾼’ 박범신 작가를 만났던 것은 적지 않은 여운으로 남았습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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