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 다녀온 지 한 달이 다 돼 갑니다만 아직 ‘로힝야’ 얘기를 우려먹습니다. 지면 등을 통해 보도된 뒤, 보여주지 못한 더 많은 사진은 ‘향이네’에 사진취재기를 연재해 내보였습니다. ‘금주의 B컷’으로 또 한 장의 사진을 싣기도 했지요. 출장 한 번 갔다 와서 사진을 너무 수다스럽게 늘어놓는 것 같아 좀 민망합니다.
난민사진을 찍으며 제게 던지는 질문이 많았습니다. ‘나(의 카메라)는 난민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가?’ ‘이 사진이 이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이 사진이 독자에게 어떻게 읽힐까?’등등. 연차를 먹는다는 것은 대책 없고, 답 없는 질문이 늘어간다는 것이란 생각입니다. 질문하는 것은 윤리적 고민과 회의 등을 '퉁'쳐버리는 고도의 수법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여하튼 끝도 없는 질문도 생겨납니다.
급기야 ‘로힝야 난민촌을 왜 갔어야 했나?’라는 물음이 생겼고, 어떤 설득력 있는(그럴듯한) 답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로힝야에 관심 없다” “또 감성팔이...”라는 기사댓글에 기인한 물음이 아닐까 의심합니다. “국제적 이슈라서" "기획이니까"라는 1차원적 답은 하나마나한 소리구요. "보편적 인권이니까"라는 답은 그럴 듯하지만 왠지 헐렁하구요.
그러다, 가까운 답을 찾았습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서.” 기사를 봤습니다. “일본정부가 한반도 유사시 수많은 난민이 몰려올 경우에 대비해 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우리가 난민이 된다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린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지금 나라 밖에서는 전쟁난민이 생겨날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 중에 하나로 한국을 꼽고 있지 않겠습니까. 또 빼도 박도 못하는 진실. 한국전쟁 때 우린 전쟁난민이었지요. 난민촌을 찾아간 이유에 “공감과 연민이었다”라는 답은 너무 거창한가요?
여하튼, 고통 앞에 카메라를 든 것이 또 하나의 상처가 아니었기를 하는 마음입니다. 로힝야 사태가 잘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yoonjoong
아래는 '향이네'에 연재한 로힝야난민 사진취재기
①난민촌 가는 길...걱정 쫓는 주술 ‘23’
방글라데시로 향하는 비행기는 늦은 밤에 떴다. 일찌감치 출장 가방을 싸놓고 동네 북카페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난민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노래로 쏘아올린 기적’(하니 아부 아사드 감독)이었다. 로힝야 난민 취재를 떠나는 날, 수없이 많은 영화 중 하필 난민소재의 영화라니. ‘이런 우연이 또 있나.’
작품은 가수의 꿈을 키워 온 팔레스타인 가자 난민 청년 아사프가 이집트로 탈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는 오디션 프로그램 ‘아랍 아이돌’에 출현해 우승을 차지한다는 내용이다. 가자지구 난민들에게 희망을 전했다는 자막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 끝부분, 실화 주인공의 우승 장면과 가자지구의 당시 환호 모습이 화면을 채울 때 뭉클한 감동이 일었다.
지금 미얀마를 탈출하는 로힝야 사람들에겐 어떤 ‘희망’이 있을까. 영화의 엔딩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문득 생각했다. 미얀마 군부의 ‘인종청소’를 피해 국경을 넘는 것이 당장의 희망이겠다 싶었다.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난민 신분이 영화와 겹치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영화 속에서 자막 처리한 ‘가자 난민에 희망을 주었다’는 것도 일시적 위안 정도에 그치지 않았을까.
이틀 후 실제 난민의 삶을 사진에 담게 된다는 게 막연한 걱정과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우연히 보게 된 영화 탓일까. 영화 장면 중 ‘페이스북 페이지에 ‘23개’의 글’이 언급되는 부분이 번뜩 떠올랐다. 전날 말라리아 예방을 위해 보건소에서 구입한 알약이 ‘23알’이었다. 기막힌 우연이다. ‘23’이라는 숫자와 난민 영화. 나쁘지 않은 징조라 애써 새겼다.
먼 길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싱가폴까지 6시간, 다시 방글라데시 다카까지 4시간, 국내선 갈아타고 난민촌이 있는 콕스바자르까지 1시간여. 대기시간까지 합쳐 20시간쯤 걸린 것 같다. 우리의 시외버스터미널 같은 콕스바자르 공항은 인상적이었다. 수하물은 활주로에서 공항직원들이 끌고 오는 카트에서 직접 찾았다. 짐을 찾는 현지 신혼부부들이 여러 쌍 눈에 띄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긴 해변이 이어진 휴양지다. 난민촌과 휴양지. 너무 극적인 도시구나 싶었다.
차량과 자전거와 오토바이와 사람이 얽히고설킨 2차선 도로를 달려 도착한 ‘롱비치 호텔.’ 세계 각국에서 적십자사와 적신월사 소속 구호 활동가들이 모여들자 임시로 얻어 운영하는 난민 지원사무소(PMO(Population Movement Operation))였다. 약간 상기된 선한 얼굴의 활동가들 사이에 끼어 안전 담당자로부터 난민캠프 내 활동의 주의사항과 안전,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로부터는 취재 시 유의할 사항을 들었다. 예상했다. ‘하지 말라’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다가는 사진 한 장 찍지 못할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했다.
숙소는 PMO 사무소와 가까운 호텔이었다. 모기에 물리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조치를 다하고 잠을 청했다. 하루가 길었다.
②난민촌을 가다
숙소인 시갈 호텔 앞. 전날 어둠에 묻혀있던 해변이 아침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그 위로 파란 하늘이 상쾌했다. ‘과연 휴양지구나.’ 눈앞의 풍광을 보며 난민촌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날 첫 목적지는 ‘메인널고나(Mainnerghona)’ 난민촌이었다. 숙소를 출발해 한 시간 반을 달렸다. 왕복2차선 도로에는 주요 교통수단인 릭샤(승객좌석을 연결한 자전거)와 오토릭샤, CNG(오토바이에 승객좌석 연결), 승합차, 버스, 트럭 등이 마구잡이로 엉켜서 달렸다. 그 사이로 사람들이 위태롭게 끼어들었다.
일행이 탄 승합차의 운전기사는 자동차 경적 위에 아예 손을 얹어두고 쉼 없이 울려대며 달렸다. 운전자의 개인 성향이라 하기엔 좁은 도로에 경적소리가 넘치고 넘쳤다. 스치듯 지나거나, 차선을 넘어 마주 달려오는 차량과 릭샤들, 차와 닿을 듯 지나는 사람들. 정신없고 아찔했다.
난민촌 가까이 이르자 도로 좌우로 ‘임시거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집들처럼 남루한 이들이 길을 걸었다. 사실, 난민캠프까지 가는 길에 목격한 방글라데시 현지인의 삶도 크게 달라 보이진 않았다. 길가의 시장이 북적였다. 과일과 야채를 빼고 색이란 것은 모두 무채색 계열로 ‘흙빛’이었다. 마치 연출된 영화의 장면인 듯했다. 난민과 방글라데시인이 섞여 있을 것이지만 “90%이상 난민이라 보면 된다”는 통역의 설명이다. 겉모습으로 로힝야족과 현지인들을 구분할 수 없었다. 나를 향해 “일본에서 왔냐?”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 좀 더 남루한 행색으로 로힝야 사람일 거라 추측할 뿐이다.
메인널고나 난민촌. 길가 작은 언덕에 길게 줄을 선 인파들이 보였다. 적십자사와 적신월사 활동가들이 구호물품을 나눠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행렬은 늘 거기 있었던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난민들은 이른 아침부터 내려쬐는 땡볕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렇게 서 있었다. 난민촌의 일상일 것이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낮은 언덕에 비닐천을 덮어 만든 난민들의 임시거처가 펼쳐졌다. 전체를 조망하는 사진을 찍을 요량으로 흙길 따라 높은 언덕으로 향했다. 난민들의 시선들이 나를 포함한 일행에 꽂혔다. 이 복합적인 시선을 짐작해 봤다. 미얀마에서 고립돼 살던 이들에게 우리의 생김새는 확실한 구경거리였다. 일행이 입은 적십자사 조끼는 도움을 주려고 온 사람이라는 표시였으므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나?’하는 짙은 호소로도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가까이와 손 내밀며 구걸하지 않았다.
다닥다닥 붙은 천막 사이로 난 길에 아이들이 몰려있었다. 낯선 이들의 출몰은 일상의 변주인 듯했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컸다. 눈이 마주쳐 손을 흔들어주면 까르르 웃으며 일제히 집 안으로 사라졌다가는 다시 고개를 살며시 내밀었다.
30분쯤 걸었을까. 트럭 한 대가 흙을 실어 날랐다. 언덕 위에 일본 적십자사의 이동의료센터의 터를 다지는 중이었다. 로힝야 난민들이 곡괭이로 땅을 골랐다. 작지만 벌이의 기회까지 주는 일석이조의 사업이다. 어디에서 가져오는 것인지 아이들이 자기 몸집보다 큰 나무를 한 짐씩 지고 집으로 향했다. 난민촌을 가르며 지나는 거친 길 위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어디로 무엇을 위해 가는 지 발걸음들이 분주했다.
언덕의 가장 높은 곳에 섰다. 난민촌은 한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60만 명 이상이 국경을 넘었다고 하니, 지금 보이는 것이 그중 얼마쯤 될까 가늠할 수 없었다. 난민의 일상이 내려다 보였다. 천막집 사이로 난 가파른 경사로마다 난민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물통을 이고 든 여성과 아이들이 흙 계단을 오르내렸다. 펌프를 이용해 물을 긷거나 몸에 물을 끼얹는 이들도 보였다. 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일상을 통해 짐작했다. 저 물이 식수가 되고 밥 짓는데 사용될 것이다. ‘안전할까.’ 상하수가 제대로 관리될 리 없다. 바닥으로 깊이 흘러든 물이 다시 펌프를 타고 올라올 것이 분명해 보였다. 작은 언덕들 사이에 호수 하나가 보였다. 하늘은 파랗고 몇 조각의 구름이 떠 있었지만, 호수는 아무것도 투영하지 못했다. 흙탕물이었다.
다시 배급 현장. 구호품을 수령한 이들이 하나씩 걸어 나왔다. 행렬은 여전했다. ‘토큰’이라 불리는 카드를 손에 쥔 난민들은 산더미처럼 쌓여있던 구호품이 줄어들자 조바심이 생기는 모양이었다. 그 틈에 슬쩍 끼어든 누군가는 쫓겨나기도 했다. 난민들은 구호활동가들의 안내에 따라 카드 확인 후 서류에 손도장을 찍고 물품 쪽으로 이동했다. 말린 음식, 천막과 끈 등을 수령했다. 긴 기다림의 끝에서인지, 꼭 필요한 물건을 손에 넣어서인지, 아니면 고마움인지, 여하튼 안도감 같은 옅은 미소가 얼굴에 스쳤다.
행렬 쪽이 소란스러웠다. “왜 새치기를 보고만 있느냐?”는 말로 이해되는 아우성을 향해 카메라를 들었다. 카메라를 바라보던 난민 몇이 옆줄에 선 이들과 팔을 뻗어 손을 잡았다. ‘무슨 의밀까?’ 셔터를 누르니 손을 잡는 이들이 몇 더 늘었다. ‘손잡은 난민들, 고난을 함께 극복하려는 의지’라는 사진설명을 떠올렸다. 셔터를 더 힘차게 눌렀다. 확인 차 활동가에 물어보니, 줄 사이로 새치기 못하게 막는 것이라 했다. ‘내가 더위를 먹은 탓일까.’ 피식 웃고 말았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아무 설명 없이 이 사진을 보여주면 어떻게 읽힐까? 안 물었으면 민망할 뻔 했다.
취재 첫날이라 일정에 욕심을 냈다. 내친김에 노르웨이·핀란드 적십자가 지원하는 현장병원(Field hospital)과 국경을 넘은 로힝야족들이 난민촌으로 이동하기 전 머무는 유엔난민기구의 임시대기지역(Transit reception area)까지 방문했다. 불안하고 불편한 하루하루일 테지만, 군부의 총부리로부터 벗어난 것에 안도하고 감사라도 하는 것인지 카메라가 향하는 곳마다 관심을 가졌고 그 표정이 어둡지만은 않다고 느꼈다.
우기가 끝났고 날이 제법 선선해졌다고는 하는데도 낮엔 30도가 훌쩍 넘었고, 그늘 없는 난민촌은 금세 달궈졌다. 뜨겁고 또 따가웠다. 딱히 먹을 것도 없고, 대놓고 먹을 수도 없어서 점심도 걸렀다. 지쳤다. 서둘러 숙소로 가고 싶었다. 상처를 안고 고난의 삶을 살고 있는 난민들을 찍으면서도 나는 내 작은 불편함에 징징대고 있었다. 난민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는 한낱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가. 어쩌면 시혜자의 오만함으로 그들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진의 진정성은 어디서 오는가.
다시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숙소를 향해 달려가는 승합차 안에서 몽롱한 상념들이 차를 따라 흔들렸다.
➂아이의 눈망울은 아팠다
전날 취재 때문인지 낯선 현장 취재에 앞섰던 걱정과 긴장도 어느 정도 해소됐다. 사진이 가능한 것을 가늠할 수 있었고, 불가능하다 싶은 것은 포기할 수 있었다. 첫날이 힘든 법. 이틀째 취재에 나서면서 몸은 가벼웠다. 둔한 몸이 현지에 적응하는 것은 참 신기한 일이라 생각했다.
우리의 승합차는 경적을 미친 듯이 울리며 달렸다. 거리의 수많은 릭샤와 버스와 트럭들도 질세라 밀어붙이고 또 밀리며 경적을 울려댔다. 전날 난민촌을 향하며 ‘저개발국의 무질서’로 받아들였던 것이 ‘묘한 질서’처럼 느껴졌다. 무질서 속에 질서 같은 것. 유연함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이 엉망인 도로에서 사고가 안 나는 게 희한하다 생각하다가, 급기야 ‘이건 예술이야’라고 감탄했다. 경적은 “비켜”가 아니라 “조심해”에 가까운 표현인 듯했다. 뭐 그 말이 그 말일 테지만.
이날 목적지는 하킴파라(Hakimpara) 캠프다. 전날 갔던 메인널고나를 포함해 쿠투팔롱, 벌마파라, 발루칼리 등 미얀마와 가까운 콕스바자르의 남부는 거대한 난민촌이었다. 하킴파라의 들머리에도 난민들의 줄이 길었다. 구호활동가들은 분주했다.
얼마쯤 난민촌으로 걸어 들어가자, 합창 같은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동친화공간(CFS·Child Friendly Space)’이라는 곳이다. 수십 명의 아이들이 적십자·적신월사 활동가와 몇 개의 원을 만들고 마주앉아 자기소개를 하는 놀이를 진행했다. 놀이를 하는 동안 큼지막하게 이름을 쓴 셔츠를 아이에게 입혀주었다.
알만한 구호단체들이 운영하는 ‘아이들의 공간’이 난민촌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구호단체들은 어린이들의 안정과 심리를 관리하는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미얀마에서 이 아이들이 눈으로, 몸으로 겪었을 고통을 그려보았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과거가 아닌 미래요,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의 존재가 아닌가.
사진기자의 눈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동친화공간’ 천막에 붙은 금지 표시였다. 장총과 카메라 그림을 가로질러 붉은 선이 그어졌다. ‘총질’과 ‘카메라질’을 금한다는 내용이다. 총질은 당연히 허락도 안 될 것이지만, 카메라질은 허락과 동의하에 가능할 것임에도 ‘이거 찍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망설이게 했다. 상처받은 아이들을 철저하게 보호하겠다는 구호단체 어른들의 배려이자 다짐으로 읽혔다. ‘카메라질을 조심하라’는 경고였다. 예전에 카메라를 본 아이가 총인 줄 알고 겁먹은 눈으로 두 손을 머리 위로 든 외신사진이 스쳐갔다. ‘카메라가 총과 나란히 폭력도구로 인식되는구나.’ 카메라의 폭력성을 가끔 새기긴 하지만 총과 동격의 대우를 받으니 낯설었고 또 괜히 서운했다.
나지막한 산같은 언덕을 두어 개쯤 넘어 ‘이동진료소’에 이르렀다. 일본, 홍콩의 적십자와 방글라데시 적신월사 의료진이 난민들을 진료했다. 국적도 다르고 일면식도 없는 의료진이 ‘붉은 십자’가 그려진 조끼를 입은 일행을 보자 그렇게 반가워했다. 악수하며 ‘어디서 온 누구나’ 통성명을 하고 서로 격려했다. 멀리 타국에서 만난 인연이 반갑고, 동지애 또한 느끼는 모양이었다.
진료소 바깥으로 긴 줄이 이어졌다. 진료를 기다리는 환자들인 줄 알았더니 난민촌 내 임시거처를 등록하는 줄이었다. 가족단위로 서서 거처의 고유번호와 가족신상 등이 적힌 카드를 들고 하얀 천을 배경으로 섰다. 방글라데시 군인이 휴대폰 카메라로 가족의 사진을 찍었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든 군인이다. 아동친화공간의 금지 그림이 스쳤다. ‘총’과 ‘카메라’는 그렇게 상호전환이 가능한 것이었다. 구호품 수령과 가족 관리 등 행정 편의를 위한 절차로 보였다. 가족들 얼굴이 굳었다. 긴장한 표정이다. 미얀마 군인들의 폭력(탄압)을 보았을 가족에게 국경 넘어 군인들이라고 편할 리 없다. 총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해도. 이들에게 어쩌면 생애 첫 가족사진 일지도 모른다.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한국어로 시작해 다시 한국어로 돌아오는 통역의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기다리는 난민들의 줄은 길었다.
언덕을 오르내리면서 걸었다. 언덕을 계단식으로 깎은 자리에 어김없이 임시거처 천막이 들어섰다. 이미 꽉 들어차 있는 곳이 있고, 이제 막 지어지는 곳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난민촌은 계속 넓어져갔다. 난민촌의 전경이 가장 잘 보일만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진기자는 모든 사진의 기본이요, 시작을 ‘전경’이라 생각한다. ㅠㅠ 난민촌의 땡볕은 거침이 없었다. 더위에 인상을 찡그리다가도 아이들의 호기심을 보면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사진을 찍으면 수줍어했고, 사진을 보여주면 ‘까르르’ 좋아했다. 아이들에게 재미를 주는 바로 이 순간의 ‘셔터질’은 폭력 아닌 위로라 말할 수 있으리라. 사진을 뽑아 줄 수 없어 아쉬웠다.
어김없이 난민촌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막힌 곳이 없어 바람이 자주 불며 지나갔다. 구름이 조금 끼었고 하늘은 맑았다. 머리 위 높이 연 하나가 날았다. 연줄을 쥔 아이는 일행의 시선에 신이 났다. 고향에서 가져온 연일 것이다. 흰 구름과 파란색의 하늘을 오가며 날고 있는 연을 보며 기왕이면 파란 쪽 하늘에 머물기를 바랐다. 파란 하늘이 희망의 은유이기를 주문하면서.
한 가정을 방문했다. 넓지 않은 임시거처에 11명의 가족이 모여 살았다. 나무 기둥에 천을 이리저리 엮은 집이다. 단단하게 다진 흙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그 위에 돗자리를 깔았다. 음식을 하던 참이었던지 불을 지폈던 천막 안이 매캐한 연기로 가득했다. 눈이 따가웠다. 취재기자의 인터뷰가 이어지는 동안 가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이 굳었다.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동안 떠올리기 싫은 고향땅의 기억이 되새겨졌을 거라 짐작했다.
천막 안은 덥고 습했다. 대가족에, 우리 일행에, 구경 온 동네 사람까지 북적였다. 천막에 가로로 길게 벌어진 틈 사이로 간간이 산바람이 비집고 들어왔지만 더위와 습기를 걷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무언가 나의 시선을 스쳐갔다. 잠시 주춤했다. ‘뭐였지’하고 다시 잠깐 그 순간을 기다렸다. 천막 틈사이로 들어온 빛이 저만치 앉은 꼬마 여자아이의 눈에서 반짝였다. 빛이 반짝인 것이 아니라 아이의 눈이 반짝인 것이다. 망원렌즈를 들어 아이의 눈을 주시했다. 아이의 눈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 큰 눈망울에 상처와 두려움이 들어있다고 느꼈다. 눈 주위로 맺힌 작은 땀방울이 눈물처럼 보였다. 아이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 사진을 찍기 위해 어제, 오늘 이러저러한 사진들을 찍고 있었구나’하는 생각까지 했다. 아이의 눈이 내 마음을 가장 크게 흔들었다. 저 눈에 더 큰 아픔이 새겨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차량으로 이동하는 동안 그 ‘눈의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이 사진의 울림이 적어도 내겐 꽤 오래갈 것 같았다.
숙소에 돌아와 이날 찍은 사진을 정리했다. 노트북에 사진을 띄워놓고 아이의 눈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아팠다.
④국경을 가다
방글라데시 남쪽 국경지역인 테크나프(Teknaf)에 가보고 싶었다. 막 국경을 넘은 난민들을 만날 수 있을까 해서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최근 방글라데시 군의 경비가 한층 까다로워졌다고 했다. 이 지역을 담당하는 구호 단체 활동가도 한두 주 전에 출입신청을 하고, 허가를 받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전날 취재하던 난민촌에서도 차로 두 시간쯤 더 가야되는 곳이었다. 운 좋게 국경 근처까지 간다고 해도 취재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통역을 맡은 이 지역 청년 아짐이 가까운 곳의 다른 국경을 안다고 했다. 얼마 전 독일 활동가들과 한 번 다녀온 곳이라며 앞장섰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마을길을 따라 걸었다. ‘굳이 멀고 취재여부도 불투명한 곳까지 갈 필요가 있나’ 땀을 삐질 흘리며 한참을 걷다가, 그 휑한 농촌 길을 지나가는 릭샤를 흥정해 타고 얼마쯤 가니 검문소가 나왔다. 군인이 서 있어 검문소인지 알았다. 두 갈래로 나뉘는 길 한쪽에 긴 막대 하나 걸쳐 놓고 통제했다. 군인 서너 명이 한가로웠다.
지난주만 해도 이 지역으로 5000명 이상이 넘어오던 곳인데, 요 며칠 한 명도 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떤 변화가 생긴 걸까. 더 안전한 루트를 개척했나? 검문소 뒤 멀리 보이는 산이 미얀마 땅이라고 했다. 저만치 보이는 언덕 위에까지 가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책임자의 표정은 ‘오케이’인데, 막상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은 “노”였다. 금전을 요구하는가 싶었지만, 난민이 오지 않는 곳에서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없었다. 발걸음을 돌렸다.
‘카톡 찬스’를 썼다. 2주일 전 로힝야 난민을 취재하고 돌아온 사진가 조진섭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국경 ‘사포리딥’ 마을을 추천했다. 아짐에게 물었지만 그의 긴 설명으로 보아 어정쩡한 시간에 가기엔 너무 먼 거리였다. 다시 원점으로. 출입허가를 받진 못했지만 일단 테크나프로 향했다. 가는 길에 무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군이 지키는 검문소가 나타나면 살짝 긴장했다. 웃음 띤 인사와 통역 아짐의 재치로 몇 개의 검문소를 지났다. 외국인을 상대로 그리 빡빡하게 굴지는 않았다. 나프강을 끼고 도는 전망 좋은 언덕 위에서 관광 온 방글라데시 청년들이 차를 세워놓고 셀카를 찍고 있었다. 배경은 강 건너 미얀마였다. 그 모습을 담으려 내렸더니, 한 청년이 다가와 내 팔을 덥석 잡는다. 현지 청년들 사이에 서서 얼떨결에 셀카 멤버가 됐다. ‘이 친구들아 난 지금 마음이 바쁘다’라고 되뇌면서 얼굴엔 한가득 웃음을 머금었다. 언덕을 돌아 넘어가니 테크나프였다.
마을까지는 왔다. 좀 더 들어가면 출입허가를 확인하는 마지막 검문소가 있을 터였다. 가볼까, 말까. 망설였다. 그때 길가에 선 낡은 트럭 위에 남루한 행색의 난민들이 보였다. 지치고 불안한 표정으로 짐작하고도 남았다. 미얀마를 탈출해 전날 밤에 방글라데시로 들어왔단다. 방글라데시 군의 간단한 검사를 받은 뒤 트럭에 올라타고 마을을 지나는 길이었다.
사실, 거기 서 있을 이유가 없는 트럭이었다. 독일에서 온 구호 활동가들이 막아 세운 것 같았다. 출입허가를 얻지 못해 국경의 군인 관리지역까지 들어가지 못하자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구호활동 지역에서 ‘조끼’는 곧 동질감이다. 적십자 조끼를 입은 우리 일행을 보고 그렇게 반가워했다. 짧은 인사를 나누자마자 “얼음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그들의 차량 안을 슬쩍 들여다봤더니 한 난민아이가 누워있었다. “열이 40도까지 올랐다”고 했다. 얼음이 채 녹지 않은 페트병을 건넸다. 나이가 지긋한 독일 활동가들은 그 틈에 빵을 한 상자 사서 트럭 위에 실었다. 그때 나는 사진을 찍으려 트럭의 발판을 딛고 올라섰다.
빵을 향해 손을 뻗는 난민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외신으로 수없이 봐오던 장면이다. 하지만 이 전형적인 장면과 맞닥뜨린 순간 ‘이거다’하고 셔터 위의 손가락엔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머리 위로 치켜든 카메라에서 셔터 소리가 요란했고, 난민들은 카메라를 힐끔거렸고, 난 좀 부끄러워졌다. 누군가의 상처 앞에서 카메라를 드는 것이 사진기자의 숙명일진데 경험적으로 인지하는 ‘바로 이 사진’이란 것이 대상에 가혹할 경우가 많다. 그 사진이 가장 아프고 비참한 이미지일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보도전문채널에 주기적으로 나오는 구호단체의 후원금 모집 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난민 트럭이 다시 출발하자, 우리는 국경으로 가는 것을 포기한 채 따라 붙었다. 레다 지역의 난민촌에 못미처 트럭은 멈췄다. 학교 건물에 임시로 마련된 ‘난민등록센터’였다. 앞서 등록을 마친 로힝야인들이 센터 앞 공터에 모여 있었다. 센터에 들어선 난민들은 군인들의 안내에 따랐다. 한사람씩 사진을 찍고 열 손가락의 지문을 등록했다. 프린트된 카드에 다시 지장을 찍었다. 이주민의 신분으로 관리와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이 카드를 항상 걸고 다녀야 한다.
카드에는 사진과 가족, 종교, 국적 등이 적혀 있었다. 시민으로 대접받은 적 없지만 국적은 미얀마, 종교는 이슬람이다. 다수 불교도의 나라에서 무슬림이 탄압의 이유였다면 무슬림이 다수인 이웃나라로 넘어와 최소한의 인격을 유지하기 위해 ‘이슬람’ 말고 무슨 종교를 쓸 수 있을까.
오가며 마주치는 로힝야인들의 시선에 제법 익숙해져 꽤 오래 그 눈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시선은 나와 일행에 대한 호기심뿐만이 아니었다. 탄압의 공포, 고통과 상처, 절망과 분노, 불안 등의 얘기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여기까지 오게 된 나와 내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 볼래’라고 하는. 그들이 내 카메라를 통해 드러내려는 메시지는, 내가 찍는 난민촌의 모습보다 오히려 카메라를 주시하던 그 ‘눈빛’에 들어있지 않을까.
다시 메인널고나 난민촌으로 향했다. ‘내가 찍는 사진이 이 로힝야 난민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생각했다. ‘테크나프에서 만난 지친 난민들에게 건넨 생수 든 페트병 이상의 가치가 있나?’하는 물음이 이어졌다. 대답할 수 없었다. 연차를 먹는다는 건 쉽게 답하지 못할 질문들이 많아지는 일일까. ‘이미 익숙한 외신사진과 다른 것은 무언가?’ ‘나는 왜 이 사진을 찍고, 이 사진은 또 무슨 소용인가?’ 질문이 쌓여갔다.
난민촌의 일정을 마무리 짓고 숙소로 가는 길. 뜨겁던 태양이 조금 기울었고 늦은 오후의 매력적인 황금빛이 드리웠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국경을 막 넘어온 난민들에게는 잔인하게 느껴질지 모르는 날씨라고 생각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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