놓치고 싶지 않은 문장은 너무 많아지고 격랑의 파도 속에서 밑줄을 긋다 보면 글이 좋아 밑줄을 긋는 것인지 밑줄을 긋기 위해 글을 읽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 되기도 한다 (134p)
자기의 인생관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거나 지금껏 보고 들어 알고 있었어도 느끼지 못했던 통찰의 획이 마음속에 그어지는 순간이 있다.(135p)
사진가 허영한의 에세이 <함부로 말할 수 없다>(새움)를 읽으며 제가 딱 그 지경이 되었습니다. 책은 그의 깊은 사유와 통찰이 녹은 ‘사진인문학에세이’입니다. 그는 이런 ‘말의 규정’을 싫어할 것이 분명합니다. ^^ 저와는 평소 소주 한 잔 하는 사이인지라, 그의 깊이는 진작 알고 있었지만 책으로 경험하는 것은 새삼스럽습니다.
책을 읽으며 줄을 많이 그었습니다. 동시대에 카메라를 들고 밥벌이를 하다 보니, 그의 통찰에 울림이 컸습니다. 사유가 얕은 제가 사유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돌아서버렸던 여러 지점에서 그는 깊은 사유를 펼쳤습니다. 내공이 다른 분이지요. “빛의 출발과 여로로서의 천문학, 빛의 도달과 해석으로서의 뇌과학에 관심이 많다”는 건 처음 안 사실입니다. 읽은 책을 그냥 놓기가 아까워 읽는 동안 줄을 짙게 그었던 부분만 블로그에 옮깁니다. 책을 두 번 읽는 셈이된 것이지요.
나는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면, 사진 찍는 일에만 안달하지 말고 지금까지 찍어놓은 사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라”고 이야기한다. ……카메라라는 도구를 써서 기록했지만 기억에서 사라지고 데이터라는 기계적 형식으로만 남은 순간들은 찍지 못한 사진들에 비해 무엇이 우월한가. (17p)
파도가 넘지 못하는 방파제 아래 바다에는 서로에게 닿지 못한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떠다니고 있었다. 잃어버린 부모를 찾는 애탄 부르짖음의 카네이션과 수학여행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이를 부르는 부모의 피눈물 같은 빨간 포장의 초코파이가 엉겨 방파제에 부딪혔다. (19p)
먼저 와 있던 사진기자들은 침묵 속에서 근근이 카메라를 들었다. 그들도 깊은 상처를 받고 있었다. 인간적 괴로움은 물론이고 사진이 어찌하지 못하는 너무 많은 것으로부터의 절망은 깊었다…… 언론이 싸잡아 비난당할 때마다 사진기자들은 적대의 최전선에서 화살을 받아왔다. 카메라는 기자라는 직업을 상징하는 대표적 착의(着衣)이기 때문이다. (20p)
팽목은 그에게 사진기자로서 마지막 출장지였습니다.
나는 사진의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해 고민했다. 사진은 상황을 판단하거나 증명하는 기능 이외에도 말로 할 수 없는 힘이 있다. (30p) 사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만,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의 상투적 말을 따라가는 사진을 찍는 일이다. (34p)
사진의 이름으로 세상을 대하는 자로서 그런 흥분과 분노의 순간에 맞는 무기의 행색으로 ‘똑딱이(작은 자동카메라를 부르는 속칭)’는 서글펐다. (45p)
그저 흘러갈 뿐인 시간 속에서 각별한 한 순간은 가끔 사람의 마음에 쿵, 소리를 낸다. 사진 속 아이는 이제 영원히 머리에 우주를 이고 있게 되었다. 사진은 남아서 아무것도 아닌 순간을 오랫동안 이야기할 수 있게 했다.(53p)
그의 사진집 <사하라에 가을을 두고 왔다>(73p)에도 실렸던 사진입니다. 빛나는 두 눈을 가진 아이 머리 위에 잠시 내려앉았다 날아가버린 하얀 홀씨의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를 다시 사하라로 가게 만든 사진이었다지요.
사진은 사진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사진만으로 이야기 되지 않는 사진의 순간이라는 불합리를 처음으로 느꼈다. (55p) 사진의 출발은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포획의 은밀한 욕망...(56p)
굳이 사진까지 찍은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순간의 기억을 생생하게 만지며 살게 되었다. 지금도 가끔 들춰보는 그 사진은 문득 나에게 사진하는 이유인지 의미인지를 물어오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 ‘잘 살고 있냐’고…….(65p)
혼자 나선 마지막 퇴근길의 무거운 하늘을 감당하기 버거워 술을 마셨다. 동료들은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지만, 그 권유가 강하지 않았고, 감당할 수 없는 질문과 나도 알지 못해 부질없을 대답의 시간이 막막해서 다음으로 미루었다.(68p) 버스를 내린 나는 ‘내가 내 외연으로서의 사진으로 누군가에게 아카시아 향수 한두 방울 정도의 위안을 줄 수 있을까. 아니면 누군가 절절한 시간을 견디는 데 한 줌이라도 도움을 줄 수 있을까’...(71p)
사진으로 남았거나 남지 않았거나 지금 없는 것에 대한 기억은 사람의 심리 속에서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연민’이다. 부재와 세월은 한 장의 사진이 증명하는 순간과 지금의 간극 사이에 많은 이야기를 채워준다. 그래서 사진은 시간의 예술이고, 기억하는 매체다.(80p) 사진은 찍는 순간 이미 과거가 되어 있고, 우리가 사진 찍는 세상의 모든 일들은 그렇게 열심히 사라져간다. (81p)
아무리 대단한 사진가라도 그곳에 있지 않으면 어떤 사소한 사실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다. ‘그곳’은 반드시 장소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특정인이나 장소에 닿을 수 있는 자격과 지위를 말하기도 한다. ....(버락 오바마의) 백악관 전속 사진가 피트 수자가 찍은 사진들은 통상 권력자 주변에서 만들어지는 장면들과 달리 친근하고 소박하며 재미있는 것들이었다. 사진가가 그곳에 가 있어도 그런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사진으로 담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관계와 자세의 문제일 때가 많다.....그에게 그곳은 대통령 옆이라는 자리이기도 하지만, 대통령과의 신뢰와 애정의 관계가 더 큰 ‘그곳’이었다.(82~83p)
나에게 그곳들은 직업이 그때그때 점지하는 내 일의 자리였다. 일의 자리에서 일의 카메라를 내리는 순간, 그곳은 또 다른 사진의 자리였다. 일의 자세를 벗고 시선만 돌리면 주변의 모든 우연들이 내 사진의 그곳이었다. (85p)
사진의 말이 소리를 내는 언어와 같을 순 없지만, 나는 사진으로 그들의 무심한 순간들을 어루만지려 한다.(106p)
우리가 사진을 찍는 모든 눈앞의 순간들이 사실은 우주의 시간과 빛으로 이루어진 과거의 집합체인 것이다.(111p) 우리 앞에 도달한 우주적 시간의 산물들이 우리의 기억을 대신한 기계인 카메라에 남겨지는 것이다. 한 장의 사진에는 각기 출발점이 다른 수많은 과거들이 쌓이고 잘라진 단면이 존재한다.(112p) 무심코 찍는 사진 한 장에 얼마나 위대한 우주의 시간이 담겨있는지..... 지금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과의 거리만큼 과거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은 그 사람의 현재에 좀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당신 앞에 있는 사람들은 머나먼 어느 별에서 출발한 우주의 자손이고, 또 멀고 먼 시간으로부터 당신에게 배달된 영겁의 선물이다.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게 된 데는 별빛의 역할이 크다. (113p)
허영한은 참 따뜻한 사람입니다. 사람의 현재에 다가가려는 노력의 결과요, 결국 별빛의 덕이었던 것이었네요.
사진의 모든 말들이 보는 순간 이해되고 그 메시지가 명징해야 한다는 순진한 믿음은 나의 언어습관에서 한참 먼 곳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는 이제 은연중에 슬며시 자리 잡는 말, 소리 내지 않아도 보이거나 들리고, 그런 눈과 귀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존재하는 세상의 사소한 통찰에 대해 말하고 싶어서 사진을 찍는다.(123p)
오래전 사진들은 마치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보낸 편지 같은 것이다. (125p)
예술가는 자기의 언어로 세상에 할 일을 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지루하고 상투적인 것들을 자기만의 눈으로 걷어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빼어난 수사와 절정의 서사가 아니더라도 담담한 관찰과 사유의 목소리로 눈앞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137p)
사진은 곧 사라질 현재의 파편을 겨우 붙잡고 기대야 하는 기록의 도구가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까지의 길을 보고 미래를 말할 수 있는 언어다. 그래서 사진을 이해하는 것은 또 하나의 언어를 갖는 것이다. (146p)
사진은 때로 철학을 사진의 언어로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해 인식하고 언어가 닿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들에 대해 함께 생각한다. 세상에 대한 관찰과 오랜 사유, 인간적 교류와 삶의 방식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람과 세상의 관계들에 대해 사진으로 말하는 것이 사진가의 일이다. (151p)
세상 모든 사소한 존재들의 지나온 시간과 내 앞에 보이는 순간들을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이 내가 사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손 한 번 허공에 휘둘러 생기는 한 줌 바람 같은 일로, 누군가 잠시라도 각별한 기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내 사진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이다.(155p)
우연은 인연의 다른 이름이고 필연의 뒷모습이다......우연의 순간에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다. 사진 한 장 찍는 것이 사실은 세상 만물과 생명들과의 인연을 담는 일이다. (190p)
허작가가 어느 술자리에서 찍어준 제 모습입니다. 이 사진으로 그는 어떤 얘기를 풀어놓을까 궁금합니다. ^^
나의 사진을 찍고 보여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타인의 사진을 나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읽어내는 것이다......이미지를 해석하는 방식은 서로 달라도, 보편적으로 형성된 정서와 유사한 시대적 기억들이 있기 마련이다. 보편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들은 서로 간섭하고 도우면서 우리 마음속에 의미 있는 형상을 만들어낸다......익숙한 것들의 새로운 얼굴과 새로운 것들의 익숙한 외형은 때로 누군가 발견해주기를 기다리는 세상의 비밀이다. (195p)
우울과 회의는 나를 포함한 현실의 풍경을 유체이탈 상태에서 바라볼 수 있는 제3의 눈을 갖게 했다......우울과 회의는 몸보다 생각 속에서 대면하는 세상의 넓이가 더 넓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카메라를 들기 전에 망설이고 뒤를 돌아보고 하는 것은 사진적 기회를 놓칠 가능성이 높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이 찍어도 되거나 찍어도 의미 없는 순간들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약간 차분하고 쓸쓸한 기분으로는 나만 찍을 수 있는 사소한 교차의 순간을 볼 수도 있다. (212~214p)
그는 평소 술자리에서조차 말수가 적습니다. 막 뱉는 저와 달리 몸에 밴 사유의 습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책 읽으며 했습니다. 덩치와 감수성의 상관관계는 밝혀진 바 없으나, 그는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감성으로 사진과 글을 다루는 사람입니다. 그저 부럽습니다.
허영한은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처럼 사진에 대해서도 참 겸손합니다. 사진가로 사진의 언어를 가졌지만,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책 제목처럼 말이지요. 사진뿐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함축하는 것 같습니다.
카메라를 다루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널리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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