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문 앞에서

나이스가이V 2021. 5. 29. 22:57

'바로 저 문이었구나'

 

눈앞의 문은 앞서 출장을 경험했던 동료들이 얘기했던 바로 그 문이었습니다.

 

굳게 닫힌 문 앞에는 기자들이 바짝 붙어 섰습니다. 들었던 말에 의하면 선한 얼굴을 하고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 미국 기자들에게 속아선 안 됩니다.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 띤 표정으로 인사를 합니다만 딱 고만큼만 받아서 웃어주되,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닫힌 문 너머에는 한미 양국의 정상들과 참모들이 회담을 열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기자들이 먼저 자리를 잡지만, 이곳에서는 회의 중에 잠깐 문이 열리고 기자들이 들어가 취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미 정상회담 출장을 하루 앞두고 한 동료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 전화였지요. 그는 트럼프 시절 문 대통령을 따라 백악관을 취재했던 경험을 들려주었습니다. ‘좁은 문이 열리면 먼저 자리를 잡으려는 미국 기자들이 밀치며 들어간다. 사진 포인트를 잘 아는 미국 기자들에 밀리면 중요한 사진을 놓칠 수 있다. 텃세가 심하다.’ 그러고는 지지 말라, 밀리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짧게 요약해 옮겼지만 그의 문장 사이사이에는 욕설이 낭자했습니다)

 

백악관 내 공간과 취재 동선에 익숙한 자국 언론사나 통신사 기자들에게 한국 기자들은 낯설고 성가시고 긴장을 부르는 존재였을 테지요. 자기들의 자체 룰이 침해당할까 걱정이 됐을 지도 모르지요. 자리를 잘 잡는 것이 모든 기우를 불식시키는 최선입니다. 미국 기자들은 어떤 행사에 앞서 어느 문 앞에서 기다려야 하는지 미리 알고 자리를 선점했습니다.

 

출장 기자들도 그냥 당할 순 없지요. 슬금슬금 앞으로 가서 붙었습니다. 육상 출발선에서 총성을 기다리는 선수들처럼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은근한 긴장이 몸을 훑고 지나갑니다. 밀리지 않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렇다고 뛰어서는 안 됩니다. 최고 권력자의 주위에서 뜀박질은 위험합니다. 잘 훈련된 경호원들이 즉시 총을 뽑아들 지도 모릅니다. 빠른 걸음으로 정확한 목표 지점을 향해야 합니다. 

 

가까이서 '영어 회화'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리스닝모드로 전환되는 몹쓸 습관을 갖고 있지만, 이곳 출입기자들의 빠른 영어 잡담엔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여차하다 출발 신호에 대한 반응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문 앞을 먼저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쇼트트랙 선수처럼 절묘하게 공간을 파고들어야 했지요. 진실된 동료의 조언, 놀랍도록 비싼 출장비 등 별별 것들이 머릿속에서 엉켰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좁은 문으로 기자들이 경쟁하듯 쏟아져 들어갔습니다. 회의 테이블 어디에 누가 앉았는지 파악할 새도 없이 옆 눈 가린 말처럼 중앙으로 향했습니다. 어찌어찌 뒷줄 정중앙 바로 옆자리에 섰습니다. 최선은 아니었지만 차선쯤은 됐습니다. 자리다툼의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았습니다. 취재구역이 정말 좁았습니다. 땅덩어리의 스케일에 비해 참 쪼잔하기 그지없는 취재공간이었지요.

 

얼마나 주어질지 알 수 없는 시간동안 쉬지 않고 셔터를 눌렀습니다. 아마도 5분 정도 됐을 그 시간동안 나름의 집중력으로 엄청난 에너지를 때려 부었습니다. 회담 공개 취재가 끝나고 회의장을 걸어 나오며 참았던 거친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옷엔 땀이 흥건히 배었습니다. 길었던 긴장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의 취재였지요.

 

무심코 몇 컷 눌렀던 '문 앞 사진'은 이 글의 포스팅을 예견했던 모양입니다. 

어떤 사진에는 이런 처절한 사연이 녹아있기도 합니다.

 

'사진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매일 걷고 있습니다  (0) 2021.06.11
하늘과 바다를 매일 보고 있습니다  (0) 2021.06.08
컵라면을 먹으며  (0) 2021.05.26
'꽃 한 송이 놓지 못했구나'  (0) 2021.05.15
소심한 저의  (0) 2021.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