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580

산이 거기 있어 오른다고?

한달 전, 일을 위한 산행은 ‘그냥 노동’이라고 블로그에 썼습니다. 요즘 데스크가 자꾸 저를 산으로 보내는군요. 이번에는 새벽산행이었습니다. 약간의 무서움이 동반된 역시 '노동'이었지요. 새벽 4시50분 북한산성 성곽에 있는 ‘동장대(산성수비의 총 지휘소)’를 향해 걸었습니다. 달도 없어 완전 깜깜한 시간의 산행이었습니다. 홀로 산행이 부담스러워 취재차량 운전하시는 형님께 동행을 부탁했습니다. 헤드랜턴과 손전등이 비추는 딱 고만큼만 밝히면서 산을 탔습니다. 이 인공의 불빛 이외엔 까만 하늘에 맺힌 별빛이 전부. 사위는 온통 암흑이었습니다. 오가는 사람도 전혀 없구요. 열흘 전쯤 같은 취재 건으로 조선 숙종 때 지었다는 행궁(임금의 임시거처)터를 찍으러 다녀갔기에 행궁 옆길을 따라 동장대에 이를 수 있다는..

사진이야기 2013.11.19

'추억 선물'

그가 스튜디오 문을 밀고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딱히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봤던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젊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80년대 인기밴드 다섯손가락의 리더 이두헌. 제가 10대 초반일 무렵 형이 샀던 것으로 기억되는 ‘다섯손가락’의 테이프를 집에만 오면 카세트에 꽂아놓고 반복해 들었습니다. 그가 작사·작곡한 ‘새벽기차’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등이 든 1집과 ‘사랑할 순 없는지’ ‘풍선’ 등이 수록된 하루 서너 번씩, 테이프가 늘어나도록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모든 노래를 줄줄 외워 불렀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제가 제법 감정까지 넣어 불렀던 것 같습니다. “희미한 어둠을 뚫고 떠나는 새벽기차는 허물어진 내 마음을 함께 실었네. 낯설은 거리에 내려 또다시 외로워지는 알 수 없는 내 마음이..

사진이야기 2013.11.15

산울림 김창완의 주름

인물 사진, 특히 연예인의 사진을 좀 다르게 찍을 순 없을까, 고민을 합니다만 번번이 실패하고 맙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저 그런 빤한 사진을 찍고 비슷비슷한 사진이 신문에 실립니다. 산울림의 김창완을 카메라에 담을 때도 늘 그랬던 것처럼 다르지 않은 표정과 제스처를 요구했습니다. 그는 조금 어색해 했습니다. '자연스러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그가 표현한 어색함은 사진을 찍힌다는 사실보다,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는 저와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만나서 인사하자마자 사진부터 찍는 것은 현실이 그러하더라도 무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시간에 쫓기듯 사진을 찍는 것이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어색함을 누그려 볼 요량으로 “지금 표정 너무 좋아요”라고 역시 틀에 박힌 멘트가..

사진이야기 2013.11.08

사진기자의 한국시리즈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5차전을 다녀왔습니다. 먼저 3승 고지에 오른 두산이 이날 삼성을 꺾으면 한국시리즈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기자실에 들어서니 오랜만에 보는 스포츠지 선후배들이 반겨줍니다. 준플레이오프부터 수차례 연장 끝 승부와 한국시리즈를 취재하며 심신이 지친 선후배들은 특정 팀을 응원해서가 아니라 이날 끝났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습니다. 축적된 경험이 있는지 스포츠지의 한 선배는 "종합(일간)지에서 취재 오는 거 보니 왠지 불길한데..."하고 웃습니다. "대구 가게 되면 니 탓이다”라며 제게 미리 뒤집어 씌웠지요. 오후 6시 경기인데 3시쯤 도착해 자리 추첨을 했습니다. 매체가 워낙 많기 때문이지요. 선착순이라고 했으면 전날 와서 진을 쳤을 것이 분명하기에 나름 정..

사진이야기 2013.10.31

'아웃포커스를 허하라'

국정원 정치·선거 개입 사건 특별수사팀에서 배제된 윤석열 전 팀장이 국정감사에서 “수사 초기부터 외압이 있었고,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사진기자의 카메라가 향할 대상은 자명합니다. 다음날 황교안 장관은 청와대 국무회의에 참석했고 23일자 경향신문 1면을 포함해 몇몇 신문이 박근혜 대통령 뒤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는 황 장관의 사진을 게재 했습니다. 전날밤 청와대에서 이 사진을 다른 사진으로 교체해 달라고 했다더군요. 사진 앵글 왼쪽에 있는 박 대통령의 얼굴이 ‘아웃포커스’ 됐다는 이유였습니다. 사진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파문이 커지는 국정현안에 침묵하는 대통령과 수사 외압 의혹에 함구하는 황 장관을 한 컷에 잘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청와대에는 보통 신문사의 고참급 사진기..

사진이야기 2013.10.28

그냥 노동입니다

가을이 깊어져 강원도 일대 산에는 단풍이 절정을 이뤘답니다. 지난 일요일, 아침 일찍 출근해 오대산의 단풍을 담으러 갔습니다. 산행객들이 붐비기 전에 월정사를 지나 옛길인 선재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처음 걷는 길이라 마음이 분주했지요. 대략 목적지까지의 왕복시간을 계산했습니다. 상원사나 비로봉이 목표가 아니라 신문에 쓸만한 그림이 있는 곳이 바로 목적지지요. 왕복 4시간 정도로 예정했습니다. 그 시간 내에 그림이 반드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밥 먹고 마감시간을 맞출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습니다. 마음처럼 발걸음도 바빴습니다. 저의 걸음은 일반 산행객의 두 배 정도의 속도를 유지했습니다. ‘저 사람 이 좋은 산에서 왜 저리 급할까?’하는 시선을 느꼈지요. 산에서는 오가는 사람 사이에 양보가 미덕이..

사진이야기 2013.10.22

사진 편집의 묘미

용산참사 때 강경진압을 지휘했던 김석기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 그제 한국공항공사 사장에 취임했습니다. 취임식이 있던 날 용산참사 유가족들은 노숙 농성을 하며 공항공사 출입구를 지켰습니다. 김석기 사장의 진심어린 사과를 요구하면서 말이지요. 김 사장은 유가족을 피해 일찌감치 옆문으로 들어가 오전 9시쯤 취임식을 하였습니다. 식 후 용산참사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김 사장은 “불가피했다. 안타깝다”며 늘 하던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같은 시간 건물 밖에서는 유가족들이 김 사장의 사퇴를 요구하며 보안요원들과 몸싸움을 벌였습니다. 그가 유가족들 앞에 서지 못하고 직접 사죄하지도 못하는 이유가 권력에 기댄 오늘의 이 ‘자리’때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 사장은 용산참사 이후에는 오사카 총영사를 지내기도 했습..

사진이야기 2013.10.18

진정성을 가르쳐 준 시인

‘진정성’이라는 단어가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강조되는 만큼 ‘진정성’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라는 얘기겠지요. 뜻을 알고도 모호한 이 단어가 사전이 아닌 한 사람의 표정과 몇 마디의 말로 각인됐습니다. ‘아~ 이게 진정성이라는 것이구나’하고 말이지요. 지난 주 남원 만행산 귀정사에 다녀왔습니다. 이곳은 투쟁 현장의 노동자와 활동가들이 쉬어갈 수 있는 곳, 사회연대쉼터인 ‘인드라망’이 있는 곳입니다. 개원을 앞둔 이 쉼터 구성원들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중에 ‘거리의 시인’이라 불리는 송경동 시인이 있었지요. 희망버스 기획으로 투옥되는 등 고난의 시간을 보낸 그는 올 2월 이곳에 와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를 현장에서 여러 차례 봤지만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눈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습니다. ..

사진이야기 2013.10.14

5분

창간기획을 아우를 사진을 찍기위해 강원 원주로 향했습니다. '우리 안의 우리'라는 주제로 이미 기사는 완성돼 있는 상태였구요. 기사의 대표 꼭지인 협동조합 사람들을 찍는 미션이었습니다. 일을 시키는 데스크의 표정에 살짝 드리운 그림자(?)는 확신하지 못하는 그림에 대한 미안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기사를 쓴 후배 jd기자를 통해 섭외된 소속이 다른 6명의 협동조합원을 원주 시내 '밝음신협'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눈에 익은 건물이었습니다. 지난해 안철수 대선 후보를 동행해 취재한 '무위당 기념관'이 있는 건물이었지요. 참고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고 리영희 선생이 생전에 한 두 살쯤 많은 무위당 선생의 인간의 크기에 압도 당해 형님 내지는 어른으로 모셨다는 분입니다. 원주 협동조합의 정신적인 토대를 만든 ..

사진이야기 2013.10.07

'비와 사진기자의 이야기'

가을입니다. 아련한 생각에 잠기게 하는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비 오는 날엔 무슨 생각들 하시나요? 저는 잠에서 깨자마자 창밖을 내다보며 이 비를 어디 가서 어떻게 찍어야 할까를 생각했습니다. 가을비가 우울한 것이 아니라 비를 보며 일을 생각하는 저의 상황이 우울한 것이지요. 제가 유별난 게 아니라 날씨에 민감한 보통 사진기자들의 습관입니다. 수시로 내리는 비지만 다 같은 비가 아닙니다. 비라는 것도 '어떻게 불러주느냐'에 따라 의미와 때론 이름을 갖습니다. 어제의 비는 막바지 더위를 물리고 추위를 부르는 비였지요. 추위 끝에 오는 반가운 봄비, 애잔한 감성을 부르는 가을비, 지긋지긋한 장마나, 물난리를 일으키는 기습 폭우 등 계절과 비의 성격을 따져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를 고민하게 되는..

사진이야기 2013.09.25

다큐 뒤에 남는 것은-프린지 예술가들

이번 다큐에서는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예술가들을 만났습니다. 6년 전쯤 축제 현장 모습을 스케치해 다큐로 한 번 다뤘기에 이번에는 예술가에게 직접 다가가기로 일찌감치 마음을 굳혔습니다. 참여한 수 많은 예술가 중에 어떤 예술가를 선택할 것인가, 긴 고민을 한 끝에 한 영화감독의 작업에 꽂혔습니다. 그는 프린지에 참여한 예술가들을 즉흥적인 방식으로 담아내는 낯선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를 포함해 그의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만나는 예술가들의 얘기를 엮어 담아보자는 생각에 미친 것이지요. 이참에 저도 예술가가 되어봅니다. ‘사진을 찍는 내가 영화감독이 파인더를 통해 찍는 예술가와 그 작업을 찍는다’ ‘예술을 담는 그 예술을 담는다’ 장고 끝에 닿은 개념이라 뭔가 그럴듯했고, 스스로 이 시도가 ‘예술적이다’라..

사진다큐 2013.09.16

힛팅수 경쟁

컴백 가수의 쇼케이스를 난생 처음 취재 간 저는 행사장 입구에서 낯익은 타사 후배의 얼굴이 보이자 반가워서 외쳤습니다. "나 좀 케어 해줘~!" 후배는 프레스카드를 수령하는 절차와 무대 앞에 자리 잡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혼자 못할 것도 없지만 ‘뻘쭘함’에 늘 이런 식의 민폐를 끼칩니다. 한 시간 반 전에 추첨을 통해 자리배정은 이미 끝나 있었구요. 사진, 영상, 취재기자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지요.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간간이 앉은 아는 선후배들과 떠들썩하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산만한 저 양반은 누구야?’하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걸그룹 카라가 등장해 새앨범 타이틀곡 ‘숙녀가 못 돼’를 선보일 때 셔터를 누르면서도 곡 사이사이에 쇄도하는 셔터 소리가 연주의 요소인듯 섞여 ..

사진이야기 2013.09.05

내 카메라의 대화

사진을 가르쳐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주제넘게 받아들였습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하나 고민했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을 얘기해볼까 하다가 ‘그 방법을 알면 너부터 잘 찍어라’는 제 안의 질타에 즉시 접었구요. ^^ 그리하여 첫 시간에는 주어진 빛에 적정한 노출을 얻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습니다. 감도와 조리개, 셔터를 잘 설명해야 했지요. 제게는 너무 익숙한 것이지만 이걸 초보자인 친구에게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은 다른 영역의 일이더군요. 먼지 쌓인 채 방치된 사진서적도 들춰 보았습니다. ‘감도(ISO)’가 ‘감광속도’의 줄임이라는 것을 민망하지만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의심했습니다. 내 수족처럼 다룬다 생각했던 카메라를 나는 제대로 알고 쓰는가, 누군가에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안다고 할..

사진이야기 2013.08.29

이산가족상봉

지난 2004년 금강산에서 열린 제10차 이산가족상봉을 풀단의 일원으로 취재 했습니다. 바로 전 제9차 상봉당시 금강산 자락에 큰 글씨로 새겨진 ‘천출명장 김정일 장군’에 대한 우리 정부인사의 농담조 발언으로 상봉이 중단되는 일이 벌어졌었지요. 그 발언을 문제 삼아 일정을 중단시켰던 북측 인사는 '인생역전'에 성공했다더군요. 금강산으로 취재를 가기 전 통일부에서 받은 교육에서는 온통 하지 말라는 것 투성이었지요. 저의 말과 행동이 상봉행사를 중단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 살짝 쫄기도 했었지요. 앞선 상봉에서의 해프닝 때문인지 북측 인사들의 감시와 은근한 취재방해, 트집 잡기가 심했고 그래서 기분이 더럽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한동안 중단됐던 이산가족상봉 재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지난 16일 이산가족..

사진이야기 2013.08.20

'영웅'

서울시청 외벽에 걸린 대형 걸개의 글귀가 눈에 띄었습니다. 스쳐 지나며 읽은 문구에서 조그만 위안을 얻으며 흐뭇했습니다. 때마침 신호에 걸려 차창을 내리고 사진을 한 컷 찍으려는데 벤치에 누운 지쳐 보이는 남자가 글과 함께 앵글에 들어왔습니다. ‘영웅’과 ‘드러누운 남자’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어 보였습니다. 글귀와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며 간사하게도 바로 조금 전 위안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대한민국 수도의 가장 상징적인 곳에 걸린 대형 현수막이 담고 있는 ‘희망의 메시지’는 도처에 널린 무기력하고 좌절적인 삶에 대한 역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도때도 없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검찰이 되겠다”는 검찰의 말처럼 공허하기도 했습니다. ‘난세영웅’이라 했으니, 너도나도 영웅이어야 할 어지러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