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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봄

신문사 입사한 그해 가을로 기억합니다. 당시 부장께서 외신 사진 한 장을 벽에 붙였습니다. 참신해 보이고 시도해 볼만한 계절 스케치 사진을 그런식으로 붙이셨지요. 바닥에서 벽으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낙엽을 쓸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부장께서 좋다고 생각하신 사진을 어떤식으로든 흉내내 찍어보려 낙엽지는 가을마다 기회를 노리곤 했었지요.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꽤 긴 시간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이미지였습니다. 그제 인터뷰 갔다가 건물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사진을 한참 바라보며 '내가 왜 이 사진을 찍었을까?'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기자 초년병 시절 각인된 이미지에 저도 모르게 끌린 것이지요. 가을이 아닌 봄이, 빗자루 대신 롤러가, 낙엽 대신 파란 페인트가 그 자리를..

안철수는 모른다!

지난 14일 서울 상계동 한 아파트 경로당. 노원 병 보궐선거 출마 의사를 밝힌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어르신들에게 인사방문을 할 예정이었지요. 널찍한 방으로 들어선 어르신들이 벽을 따라 'ㄱ'자로 놓인 의자에 앉았습니다. 한 할머니가 "고생많다"며 아들뻘 혹은 손주뻘 쯤 되는 기자들에게 요구르트와 마가렛트를 하나씩 돌렸습니다. 안 전 교수의 방문일정이 늦어지자, 한 고참 기자가 "어이 막내, 노래 한 곡 하지?" 반쯤은 장난이었지만 소박하고 정이 있는 간식에 대한 답례이자, 어르신들이 마냥 기다려 무료해지는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나름 공경의 마음이었다고 믿습니다. 할머니들의 박자 맞추는 박수는 이미 시작 됐습니다. 그 자리에서 젤 막내 기자가 망설이는 동안 허겁지겁 뒤늦게 등장한 더 막내 기자, 노..

사진이야기 2013.03.18

찰나를 기록한다는 것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상황이지만, 딱 그때 그 순간이 아니면 언제 다시 찾아올지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 있지요. 사진 찍기를 업으로 하는 저는 바로 그 순간에 카메라가 없으면 두고두고 아쉬워합니다. 카메라가 있음에도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면 그 아쉬움은 더 하지요. 카메라를 들고 일부러 찾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것이, 카메라가 없을 때 눈에 들어와 박혀 애타게 하는 경우가 잦은 것을 보면 사진은 ‘마음 비우기’에서 시작되는 모양입니다.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82일간 미국 체류를 끝내고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하던 날. 입국장을 바라보며 사다리를 밟고 서서 안 전 교수를 기다리다 곁눈질에 들어온 장면입니다. ‘재밌네’하고 서너 컷을 찍었습니다. 판단하고 찍는데 2초쯤 걸렸을 겁니다. 광고판 속 구두 ..

사진이야기 2013.03.13

2억원 짜리 시계 보셨나요?

2억원 하는 시계 본 적 있으신가요? 그럼, ‘오데마피게’라는 시계 브랜드 들어보셨나요? 저는 이날 처음 들었습니다. 서울 변두리 아파트 값과 맞먹는 이 시계가 어떻게 생겼나 궁금했지요. 서울 시내 한 백화점이 해외 패션관을 열며 홍보 행사의 일환으로 선보인 시계입니다. 위도와 경도를 서울에 맞춰 서울의 일출과 일몰 시간이 표시된다는 세계 유일의 시계라는군요. 또 다른 낯선 브랜드 IWC 시계도 준비돼 있었는데요. 그 브랜드의 시계는 2억9000만원.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은 것도 아니고 다만 조금 묵직해 보이는 시계였지요. '묵직해 보!인!다!’는 건 만지지도 못했다는 거죠. 쫄았습니다. ^^ 사진을 찍으면서 이 사진이 신문 지면에 나갈 수 있을까, 자료를 제게 건넨 선배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지면에 ..

사진이야기 2013.03.01

개념 사진기자

일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강행하고, 일본 정부 고위 인사들이 이 행사에 참석하면서 주한 일본대사관 앞은 하루종일 일본 규탄 집회로 북적였습니다. 행사의 일환으로 유관순 한복을 차려입은 어린이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진으로도 영상으로도 손색없는 그림이지요. 대사관 앞에 모인 수 많은 내외신 매체의 카메라가 아이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남성이 "일본 물러가라"를 외치며 윗옷을 들어올리고 카터칼로 배와 팔을 번갈아 그었습니다. 카메라는 어린이들에서 이 자해하는 남성으로 일제히 옮겨갔습니다. 길게 빼지 않은 칼로 그어 긁힌 상처에 살짝 피가 맺혔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아이들 앞에서 무슨 짓입니까?"라며 C사 후배기자가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등지고 이 남성의 칼 든 손을..

사진이야기 2013.02.22

연탄재

집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달동네 104마을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사진 좀 찍어봤다는 이들은 한 번쯤 걸었을 곳이지요. 운동이라도 하려고 나설 때면 일부러 이 동네를 지나갑니다.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이 꽤 매력이 있습니다.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극적으로 또다른 골목과 연결이 되지요. 7년 전 중계동으로 이사 온 뒤 수도 없이 다녔던 동네가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낯설게 느껴집니다. 오래돼서 낯선 것들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카메라가 없어서 아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지요. 지난 4일 눈 많던 날, 104마을에는 골목골목마다 매캐한 연탄냄새가 떠다니고 있었지요. 연탄재를 찍었습니다. 서울 중계본동 104마을 골목에 정성껏 쟁여놓은 연탄재가 쌓인 눈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연탄재는 폭설이 쏟아진 이날 가파..

아사리판

시작부터 '아사리판'의 조짐이 보였습니다.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동생인 최재원 부회장이 법원에 출두했습니다. 질서와 안전을 위해 미리 SK측과 얘기한 것과 다른 식으로 최 회장이 출두하자, 취재진이 엉겨 붙어 난장판이 됐습니다. 나올 때는 이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SK측이 다시 제안해 취재진은 법원 밖 한 출입구에 포토라인을 치고 기다렸습니다. 출입구 앞에는 두 형제의 에쿠스 차량이 나란히 서 있었지요. 공판이 생각보다 길어지고 이어 최태원 회장의 법정구속 속보가 휴대폰에 떴습니다. 최 회장을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대신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 받은 최재원 부회장을 기다리며 라인을 지켰습니다. 그때까지 차량 언저리를 지키며 분위기를 잡던 한 직원이 무전을 받더니 곧,..

사진이야기 2013.02.06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올림픽

사진다큐 소재로 장애인을 가급적 많이 다루려 합니다. 2002년 생애 첫 다큐가 장애인의 이동권에 관한 것이었으니 저와의 인연이 깊습니다. 다큐를 시작하며 내세운 기획의도와 잘 부합하고 의무감, 책임감 같은 것도 생겼지요. 누가 물어오면 보통 위와 같은 식으로 답을 했습니다. 사실 10년 전 첫 다큐를 힘들게 한 뒤, 다음 다큐도 장애인 관련 소재를 찾고 있는 저를 보면서 ‘내가 왜 장애인이라는 소재에 집착 하는가’ 자문해 보았었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 중에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었습니다. 학교 인근 같은 아파트에 살았고 같은 교회에 다녔고 어머니끼리 친했고 해서 함께 다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몸을 휘청거리며 걷는 친구의 한 쪽 팔을 붙들어 주며 느린 걸음의 보조를 맞춰야 했습니다. 집..

사진다큐 2013.01.28

모범 부부

그는 구멍 난 양말을 신고 있었습니다. 양복 차림이었으니 집에서나 신는 홈패션의 일환은 아니었지요. 거실 바닥에 깔아 놓은 두툼한 러그 속으로 발을 넣었다 뺐다 하는 동안 제 눈에 띄었습니다. 찍었냐구요? 눈으로만 봤습니다. ^^ 강지원 변호사. 그는 정책중심선거로 기존 정치판에 본때를 보여주겠다며 18대 대통령 선거에 나와 0.2% 득표해 낙선했지요. 강 변호사와 대법관을 지낸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부부를 만났습니다. 부부는 삼청동 한옥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당까지 40평 남짓 되는 아담한 한옥에서 지난 2년간 월세로 살았다는 군요. 밖으로 난 창과 문에는 큼직한 비닐을 덮어 새 들어오는 찬바람을 막고 있었습니다. 덧 댄 비닐과 구멍 난 양말로 이 부부의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짐작하는 것은 오버입니..

사진이야기 2013.01.14

"좀 웃겨 주세요"

지난해 12월29일 두 건의 인터뷰 사진을 맡았습니다. 두 건 모두 새해 첫 1면 사진 후보에 올라 있다며 전날부터 데스크는 은근히 압박을 가했습니다. 혁신학교 용인 흥덕고 3학년 학생들을 만났습니다. 전날 인터뷰는 했고 사진만 다시 찍는 것이었지요. 졸업과 대학 입학을 앞둔 학생 4명을 모으는 게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근데 어떻게 나가는 사진이죠?" 한 학생이 물어왔습니다. "1면에 나갈 사진이야. 희망적인 내용에 어울리는 밝은 표정의 사진..." 1면에 나간다는 책임지지 못 할 말을 냉큼 내뱉었습니다. 신기해 하는 학생들을 데리고 교실로 올라가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시작은 무표정입니다. 슬슬 달궈 가는 것이지요. "조금 더 밝게 해볼까" "조금 더, 이가 보이도록" "자~ 활짝 웃자" ..

사진이야기 2013.01.07

비와 문재인

유세를 따라다니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비오는 날 사진기자는 손이 세 개쯤 됐으면 좋겠습니다. 사진 찍는 동안에는 우산을 겨드랑이와 목으로 지탱합니다. 카메라가 젖지 않게 하기 위함이지요. 빗발이 굵어지면 이마저 소용이 없습니다. 어제는 일하는 내내 물기를 닦았습니다. 그래도 렌즈에 뿌옇게 앉는 습기. 비오는 날 술 마시긴 좋아도 일하는 건 귀찮습니다. ^^ 엊그제는 춥다고, 손발이 시려서 일하기 힘들다고 툴툴댔는데, 추위 물러가고 내리는 비가 또 싫습니다. ㅎㅎ 천상 '사람'아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먼저라는 문재인 후보의 이날 마지막 유세장인 부산 서면에 도착해 유세차에 먼저 올랐습니다. 노래'그대에게'가 울려 퍼지고 문 후보가 흠뻑 젖은 채 등장했습니다. 우비를 입었지만 들이치는 비는 어..

사진이야기 2012.12.15

어느 무명화가의 작업실

사진기자로 살면서 제 개인적인 계획으로 명소를 찾아가는 일은 드뭅니다. 일하다보면 언젠가 가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지요. 통영 동피랑 마을도 그런 곳입니다. 안철수 전 후보가 사퇴하기 한 달 전쯤 동피랑 마을 방문해 따라갔었지요. 이날 후보의 전 일정들이 많아 굳이 사진을 마감할 생각보다는 기념사진이나 몇 장 찍으려 했었지요. 안 후보가 동피랑 꼭대기에서 마을주민과 대화하는 동안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늘짜집니다'라는 경고 문구가 써진 계단을 기어이 올랐습니다. 마을 아래로 아담한 통영항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옥상 아래 대문과 현관문 사이 좁은 공간에는 화구들이 널려있었지요. 캔버스엔 통영항이 담겼습니다. 야외에 작업실을 만든 이의 '낭만'이 느껴졌습니다. 그때 눈에 띈 것은 현장 노동자..

'기억하겠습니다. 안철수 후보'

"백의종군을 선언한다"는 안철수 후보의 회견 첫 마디가 떨어지자, 기자들 사이에서 "아~"하고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안 후보가 직접 기자회견 한다는 문자메시지가 30분 전에 들어왔고, 앞서 대리인을 통한 단일화 협상도 접점을 찾지 못한 터라 다시 '직접 나서서 담판을 하겠다'는 정도의 회견을 생각했었지요. "백의종군"이라는 말을 듣고도 순간 귀를 의심하며 셔터를 눌렀습니다. 동료 기자들의 움직임이 무척 빨라졌습니다. 취재기자들의 노트북 두드리는 소리, 사진기자의 셔터 소리도 분주해져 회견의 무게감을 꿈에서 깨듯 알게 됐지요. 만감이 교차했을 안 후보는 선언문을 읽어가다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울먹였습니다. 여기저기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기자였는지 지지자였는지 캠프 관계자 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게..

사진이야기 2012.11.26

"혹시 게이세요?"

"저...강기자님...혹시...?""아니요. 저는 '일반'입니다"공연을 앞둔 게이합창단 G_Voice의 연습을 취재하고 뒷풀이 자리에 끼었습니다.처음 본 한 여성 객원 단원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물었습니다. 1년 반 전 '게이'에 대한 사진다큐를 한 뒤 형·동생하는 게이 친구들이 좀 생겼습니다.게이는 일간지에서 좀처럼 다뤄지지 않거나, 애써 외면하는 소재중 하나지요.대한민국을 살아가는 게이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한 번 더 하고 싶었습니다.그래서 이번에는 국내 유일의 게이합창단을 다큐 소재로 잡았습니다. 연습실을 찾은 첫 날. "여기 경향신문 강윤중 기자입니다. 아쉽지만 '일반'이예요.""아~~" 단원들은 아쉬워하는 감탄사로 저를 반겨 주었습니다.지난해 인연으로 단원의 3분의 1정도는 낯이 익..

사진다큐 2012.11.19

기자들이 시장상인에게 박수를 보낸 이유

대선 취재의 '영업비밀'을 하나 밝혀야 겠네요 후보의 일정 중 사람이 많이 모이는 전통시장 같은 곳은 취재전 캠프측과 조율을 합니다 넓지 않은 곳에 후보와 캠프 관계자, 경호원과 기자들 그리고 후보를 보기위해 몰려드는 시민들이 엉기면 엉망이 됩니다 10년 전 대선에 출마한 한 후보는 앞에서 다투어 취재하는 기자를 향해 "내가 기자들 보러왔나?"며 역정을 냈다더군요 후보와 후보를 보고파하는 시민들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사전 조율을 통해 후보의 동선 중 '그림이 될만한 곳'에 미리 자리를 잡고 취재한 뒤, 이후 동선에서 빠져주는 것이지요 지난 4일 안철수 후보가 익산 솜리 5일장을 찾았습니다 미리 동선을 따라 시장을 둘러보다 호떡과 도너츠 등을 파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사실 가게보다는 웃음 띠고 있는 ..

사진이야기 2012.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