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기다림과 행운

나이스가이V 2021. 2. 8. 06:00

취재했던 사진 원본 파일을 다시 들여다볼 때가 있습니다. 가끔의 필요를 대비해 마감한 사진 이외의 사진 파일들을 바로 삭제하지는 않습니다. 최대한 시간을 끌며 쓸모의 가능성이 거의 사라지고, 메모리카드의 공간이 부족해질 때 오래된 취재사진부터 삭제를 해갑니다. 파일 전량을 보관하는 이들도 있지만, 저는 그 방대한 양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사진 에세이를 쓸 목적으로 원본사진이 든 메모리카드를 다시 열었습니다. 비슷비슷한 한 뭉텅이씩의 사진을 조금 더 꼼꼼하게 보게 됩니다. 현장마감처럼 서두르지 않아도 되는 여유 때문이겠지요. 다시 보이는 사진이 있습니다. 당시 골라내진 않았지만 더 선명하게 찍히거나 좋아 보이는 앵글의 사진이 있고, 찍으려 했던 의도에 더 어울려 보이는 사진도 뒤늦게 눈에 띕니다. 한번 봤던 사진인데도 그렇습니다.

 

사진을 골라내는 순간의 여러 상황과 조건들이 이런 '변덕'을 만드는 것 같습니다. 마감의 압박 뿐 아니라 눈과 몸의 피로도 같은 조건들, 그날의 감정과 날씨까지 사진을 보는 시야를 넓히고 좁히는 것에 관여하는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최상의 상황이 반드시 좋은 시야와 시선을 열어준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 오히려 좋지 않은 조건들이 좋은 시야와 깊은 시선을 갖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찌 됐든 매번 원본 파일을 열 때마다 채택되는 사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새기게 됩니다. 그런 사진 몇 장 찾아 올리려다 말이 길어졌네요. 

 

세계 습지의 날(2월 2일)을 앞두고 순천만 습지를 찾았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운 오후 4시 무렵 습지생태공원 내 용산전망대에 올랐습니다. 이곳은 저물녘 간조 때 드러나는 'S자' 물길이 잘 알려져 있습니다. S자 물길 위에 떨어지는 낙조의 변화가 자체로도 경이로웠지만, 사진에는 조금 더 생동감이 필요했습니다.

 

이 좋은 풍광 안으로 순천만의 '유명' 철새 흑두루미의 무리를 넣고 싶었던 겁니다. 하지만 낙조와 철새의 이동은 시차가 있었지요. 빛이 어느 정도는 있어야 사진을 찍을 수 있고, 흑두루미들은 해가 넘어가야 잠자리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장비를 아주 잘 갖춘 한 사진작가가 옆에 서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8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아 허탕을 친 적이 많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이 그냥 묵묵히 기다릴 일을 내려갈까 말까 갈등하며 기다리게 만들었습니다.     

 

해가 거의 넘어가 어둑해졌고, 눈 보다 귀가 밝아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인근 농경지에서 들려오던 흑두루미 무리의 울음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일부 무리가 서둘러 갯벌과 갈대 군락으로 돌아오고 있었지요. 카메라의 감도(빛의 양이 부족한 곳에서 빛을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수치)를 한껏 높이고, 실눈을 뜬 채 앵글 속 어둠에서 희미한 움직임을 포착했습니다. 촤르륵촤르르륵셔터 소리가 철새들의 재잘거림 속으로 날았습니다. 

 

 

어느 선배는 종종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은 곳은 없다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완성된 사진(이 곧 좋은 사진은 아니라는 게 지금 제 생각이지만)은 사진가 혹은 사진기자의 인위적인 연출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소신이었지요. ‘정자는 가져다 놓을 수 있는 거야'라는 의미로 받았습니다.

 

하지만 자연이 압도하는 곳에서 인간은 그저 무기력한 객일 뿐이지요. 철새들을 부를 수 없으니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수밖에요. '물 좋고, 갯벌 좋고, 갈대 좋은 곳'에서 인위는 오직 기다림!

 

그나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건 흑두루미들이 조금 일찍 날아오는 행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yoonjo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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