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다큐 51

사진은 문장만큼 명확할 수 있는가

‘꿀잠’이 재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있다는 소식을 지난해에 들었습니다. 사진다큐라는 형식으로 한 번 다뤄야겠다는 생각은 했는데, 타이밍을 잡지 못했습니다. 구차한 핑계지만, 다른 언론사에서 같은 형식으로 먼저 다뤘고, 딱 고맘때가 제가 조금 긴 호흡의 다큐를 취재할 상황이 아니었지요. 지나고 나서야 어디서 먼저 다루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고, 굳이 하려고 했다면 못 할 것도 아니었다 싶은 것이지요. 결국 의지의 문제였다는 결론을 내리고야 말았습니다. 이거다 싶은 소재가 떠오르면 다른 소재로 전환이 잘 안 됩니다. 꿀잠이 그러했습니다. 유연하지 못한 것도 이유지만, 비정규노동자의 집이자 쉼터인 이곳을 짓는 과정부터 사진을 찍었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후원한 기금으로 낡은 주택을 매입했..

사진다큐 2022.03.21

취재 마무리는 기념사진

노년에 한글을 배워 시를 쓰고 시집도 냈다는 ‘칠곡 할매’들은 이 코로나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을까. ‘할매’들의 한글공부 이야기를 담은 다큐영화 기사를 읽다 문득 궁금했습니다. 경북 칠곡군을 찾았습니다. 지난해 말 코로나 3차 유행 이후로 ‘할매’들의 배움터는 다시 문을 닫았습니다. 학교 가서 공부하는 즐거움을 감염병에 잃은 어르신들은 “하루하루가 참 지엽다(지겹다)”고 했습니다. “자꾸 이자뿐다(잊어버린다)”는 할매들은 ‘감’을 잃지 않으려고 일상을 삐뚤빼뚤 글로 옮겨도 보고,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두세 쪽이라도 책을 읽었습니다. “배우고 난깨 인제 풀 한 포기도 예사로 안 보이더라고예.” 북삼읍 숭오2리에서 만난 봉재순 할머니의 말입니다. 배움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할머니는 공..

사진다큐 2021.04.06

'아는 형님'

사진치유자라는 생소한 직업을 가진 이가 있습니다. 사진치유자 임종진. 제가 좋아하는 선배이자 친한 형이기도 합니다. 이웃 언론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하다 어느 날 훌쩍 캄보디아로 떠나 국제구호기구 활동가로 일했습니다. 돌아와서는 ‘달팽이사진골방’이라는 사진교실을 열었습니다. 느리고 깊게 사유하는 사진 찍기를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이 정신없는 속도와 효율의 시대에 말이지요. 그의 도전은 이어졌습니다. 뜻을 품고 대학원으로 가서 상담심리를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치유적 사진행위”를 개척하는 사진치유자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그를 소개하는 키워드는 김정일과 김광석이었습니다. 6차례 방북해 ‘뿔 달리지 않은’ 현지 주민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김정일이 아는 남한의..

사진다큐 2019.10.14

고통을 찍는다는 것

사진다큐의 절반은 소재를 찾고 선택하는 일입니다. 사진으로 표현되는가가 가장 큰 고민이지요. 소재를 고르는 데는 자연스럽게 사진기자로서의 경험이 작용합니다. 확실한 건(이것도 경험인데요), 그런 경험이 소재의 폭과 참신함을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겁니다. 외려 지난 경험이 쉬운 단념과 적당한 타협을 부추깁니다. ‘이건 이번엔 안 되겠네’ 싶어 포기하거나 다음 기회를 도모하지만 한편으로 찜찜해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내가 포기하는 이 소재를 멋지게 표현해 낼 거야.’ 유연함과 용기를 앗아가는 경험이란. 다큐를 앞두고 두어 개의 소재를 종이에 낙서처럼 써놓았습니다. 죄 없는 종이를 쏘아보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던 중에 예정에는 없던 ‘가습기살균제사건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가게 됐습니다. 특조위가 ..

사진다큐 2019.07.22

"영은씨, 상우씨 행복하세요~"

지난해 취재했던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와 통화를 했습니다. 야학에서 발간하는 계간 소식지봄호에 제가 보낸 글이 잘 실렸나, 언제 나오나, 문득 궁금해서였습니다. 안부도 물을 겸 해서 말이지요. 얘기 끝에 무심코 던졌습니다. “장애인의 날 앞두고 관련 다큐를 하려는데 뭐 없을까요?” 답을 바라고 한 말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커플이 있는데...” “아, 그래요?”라며 차분히 되물었지만, 속으로는 ‘바로 이거다’며 만세삼창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비부부 상우씨와 영은씨를 만났습니다. 둘은 장애인시설에서 ‘서로’ 짝사랑을 했습니다. 시설 내에서 연애는 허락되지 않아 만나지도,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둘은 우연하게 같은 날 ‘탈시설’을 했습니다. 우연 아닌 필연이지요. 같은 공간에서 ..

사진다큐 2019.05.08

다섯 번째 봄

세월호 참사 후 다섯 번째 봄이 왔습니다. 이전의 봄과는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이제 4월은 더 이상 옛날의 4월이 아니”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다시 4월, 다시 세월호를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난 세월을 핑계로 희미해지기도 했지요. ‘참사의 기억과 참사 후 각자의 자리에서 품었던 나름의 다짐을 다시 환기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사진다큐를 준비했습니다. 지난해 4월에도 세월호 관련 기획을 했었지요. 단원고 생존학생 장애진씨가 주인공이었고요. 그의 바뀐 꿈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애진씨가 활동하는 생존학생 모임 ‘메모리아’를 짧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다큐에는 ‘메모리아’의 활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섭외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팠고, 두..

사진다큐 2019.04.11

사람이 먼저

공구상가로 잘 알려진 을지로 일대의 재개발이 진행되는 과정에 논란이 빚어졌습니다. 을지면옥 같은 오래된 가게(노포)를 없애야 하느냐는 등 반대여론이 일자 서울시는 재개발을 다시 검토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지요. 이 과정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습니다. 서울시의 입장이 발표된 뒤 논란은 조금 잦아들었습니다. 많은 기사들이 이미 나왔습니다만, 을지로를 사진으로 기록해보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찍어 의미를 담을 수 있을까.’ 무작정 골목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무엇’은 손 글씨 간판이었습니다. ‘칠 벗겨진 낡은 간판 위에 정성스럽게 쓴 글씨와 점포의 작명과 역사에 담긴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이리저리 재다가 결국 ‘사람’으로 방향을 슬쩍 돌리고 말았습니다. 골목 안에는 30~..

사진다큐 2019.03.25

터진 봄, 터진 감성

사진기자는 계절을 앞서 감지해야 합니다. 여름이 오기 전에 시원한 물놀이를, 가을이 아직 저만치 있는데 물든 단풍을, 겨울이 미처 닿기도 전에 움츠린 출근길 시민들을 사진에 담습니다. 이것도 업자들 사이에 경쟁이 되다보니 어색하고 설익은 사진으로 억지를 부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지요. 뭐, 저라고 자유롭겠습니까. 추위가 예년만 못했다고는 하나, 겨울이 지나지 않았는데 다가온 봄을 사진다큐에 담고 싶었습니다. 설 이후 남도의 한 수목원에 연락했습니다. 몇몇 꽃나무에는 꽃망울이 올라왔다고 알려줬습니다. 꽃눈을 ‘잘’ 찍어보기로 했습니다. '출장을 언제가나' 타이밍을 잡고 있는 동안에도 제주와 일부 지역에서 서둘러 핀 꽃사진이 지면에 실리기도 했지요. 조바심이 약간 생겼지만 꿋꿋하게 꽃눈에 집착했습니다. 흔히 관..

사진다큐 2019.02.25

우리의 목소리는 '예술'이다

새해 나의 첫 다큐는 무엇이면 좋을까. 보통은 뭔가 희망적인 것을 찾기 마련입니다. 여의치 않으면 ‘황금돼지의 해’니까 돼지와 연결되는 것은 없을까, 고민에 빠집니다. 빤한 고민에 답이 잘 찾아지지 않았지요. 머리를 쥐어뜯다 지난해 포토다큐를 결산한 마지막 다큐 글의 맨 마지막 단락이 불쑥 끼어듭니다. “한해의 포토다큐를 돌아보며 아쉬움도 남습니다. 놓치고 외면했던 삶들이 스쳐갑니다. 어두운 귀는 상처받은 이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고, 둔한 손은 그 삶의 순간들에 셔터를 누르지 못했습니다. 2019년 새해에는 우리 사회에서 아파하고 상처받는 ‘작은 사람들’에게 더 깊이 공감하며 다가가겠습니다. 그 삶에 가만히 카메라를 들겠습니다.”(2018년12월29일자) ‘아파하고 상처받는 사람들...’..

사진다큐 2019.01.28

다시 만난 인연

“쪼~옥 쪼~옥 쪽쪽~” 노들장애인야학을 떠올리면 환청처럼 따라붙는 소립니다. 11년 전인 2007년 취재한 야학은 서울 구의동 정립회관에 있었지요. 술 한 잔 생각나는 날, 학생과 교사들에게 10cm도 안 되는 술집의 문턱은 까마득한 벽이었습니다. 유일하게 술을 마실 수 있었던 곳은 지하철 출입구 옆 포장마차. 그곳은 턱이 없던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학생들은 단골이었지요. 사장님은 단골이 들어서자, 종이컵과 빨대를 재빨리 테이블 위에 세팅했습니다. 손이 굽어 쓰지 못하는 학생들이 종이컵 가득 부은 소주를 빨대로 빨았습니다. 그 속도와 구체적인 소리.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중증장애를 가진 이들 또한 '한 잔'의 욕구가 크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사실 그 전에는 그런 생각조차 없었으니까요. 경험해야 ..

사진다큐 2018.1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