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야기

쓰지 못한 사진이 하는 말

나이스가이V 2019. 6. 19. 20:38

쓰지 못한 사진이 말을 걸어옵니다. 

 

사진다큐를 하면서 오래된 주상복합건물 벽에 새겨진 벽화를 찍었습니다. 건물 내부 자 중정 위로 솟은 두 벽면의 부조인데요. 50년 전에 시내 중심에 지은 화제의 건물이라, 어느 이름 난 작가의 작품이겠지 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부조는 건물 벽에 시멘트를 바르던 미장장이가 새겨넣었습니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찾을 수도 없었다는 얘기를 건물 관계자로부터 들었습니다.

 

무명의 미장장이가 남긴 50년 된 부조벽화.’ 이름 난 작가의 것이었다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테지만, 무명의 인부가 남겼다는 말에 울림이 생겼습니다. ‘다큐의 메인은 바로 이거다’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이 벽화 사진에 집착했고 글도 이 장면으로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오래된 건물 곳곳에서 뭔가 사연있는 장면을 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부조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궁금했습니다. ‘좌절된 꿈이었을까’ ‘본업은 작가였을까’ ‘왜 여기에 부조를 새겨야 했을까’ ‘고된 일에 대한 위로였을까’ ‘마주보는 벽면에 새긴 두 개의 부조는 무슨 얘기일까’ ‘그는 그림 속에 수수께끼처럼 이름을 숨겨놓진 않았을까’ ‘살아 있을까’ 질문이 꼬리를 잇습니다. 글재주가 있었다면 한 편의 장편소설의 밑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하나. 이 건물에 있는 공유오피스 천장을 가로지르는 보에 새겨진 낙서 글도 마음을 잡아끌었습니다. 리모델링 과정에 천장을 높이기 위해 기존의 낮은 천장을 걷어내자 수십 년 동안 숨어있던 글이 드러난 것이지요. 당시 배관이나 전기공사를 하던 젊은 인부들이 분필로 끼적여 놓았던 글입니다. 낙서에는 고단한 삶과 사랑에 대한 설렘 같은 것들이 들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비밀스런 곳에 그때의 마음을 즉흥적으로 새긴 노동자들의 모습과 그 마음을 떠올려봅니다.  

 

누구도 볼 일이 없었던 글이 수십 년 후 리모델링하며 드러나는 상황이 극적입니다. 새로 공사를 하며 이 글씨 부분에는 페인트칠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둔 센스도 뭉클하게 하는 지점입니다. 무명의 사람들이 고단한 일터에 새겨놓은 것에 세월이 얹히자 매력적인 이야기가 됐습니다.    

 

전해지는 잔잔한 감동 앞에 그저 셔터를 누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인이라면 시를, 소설가라면 소설을, 음악가면 연주를, 화가면 그림으로 이 감동을 표현했을 테지요. 현장의 느낌을 사진과 글로 온전하게 담아낼 재주가 없어 결국 사진다큐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쉬움때문인지 사진이 눈에 밟혔습니다. 폴더 속에 잠자던 사진이 그나마 빛을 보게 된 이유입니다.  

 

yoonjo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