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59

멸치 대가리를 따며

마른 멸치의 대가리를 땁니다. 수북이 쌓인 멸치를 보며 '언제 다 따나' 싶습니다. 한 마리씩 일일이 대가리를 따고 까만 똥을 빼냅니다. 이것은 확실히 노동입니다. 큰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면서 요령이란 게 생깁니다. 곧 지겹다는 생각이 사라집니다. 눈은 까고 있는 멸치를 향하지만, 시선은 멸치에 있지 않습니다. 딱히 무엇을 보고 있지 않는, 초점이 없어지는 순간을 맞습니다. 노동은 탄력을 받아 계속됩니다. 그 즈음에 잡생각의 공간이 생깁니다. 그 공간에서 생뚱한 시선이 튀어나옵니다. 멸치의 표정이 들어옵니다. 그것은 아마도 최후의 표정일 겁니다. 입 다문 놈, 비명 지르듯 입 벌린 놈, 대체로 무표정한 놈들 사이에 실실 웃는 놈. 억울한 마지막이었는지 눈들은 모두 말똥말똥. 대가리를 제거하는 것은 이..

사진이야기 2015.02.22

물그림자

물에 투영된 산과 겨울나무와 석탑이 선명하다. 한 폭 그림처럼 시선을 잡는다. 거꾸로 봐도 다르지 않다. 무엇인 실재이고 무엇이 현상인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바람에 흔들리고, 빛이 변하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이 물그림자다. 땅을 딛고선 것과 달리 물에 투영된 사물은 불안하다. 그래서 거짓이다. 눈을 즐겁게 하지만 만질 수 없는 신기루다.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신기루가 진짜를 대체하고 있을까. 나는 내 속에 얼마나 많은 거짓과 가짜를 참과 진짜로 가장하고 있는 걸까. 20여 년 전 복원됐다는 저 석탑도 백제의 탑은 아니다. 거짓을 투영하고 있는 연못 위 또 다른 거짓이라. 거짓의 거짓은 참인가, 더 큰 거짓인가. 물그림자를 보고 든 상념. 2015년 1월 23일. 익산 미륵사지에서 yoonjoong

내 자식같은 사진

사진을 찍기도 전에 사진 달라는 취재원의 말에 삐졌습니다. 꼭 필요하다면 사진 찍은 후에 물어도 될 것을. 작가라는 그는 쉬워도 너~무 쉽게 사진을 달라했습니다. 물론 “주세요”했는지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는지 정확한 멘트는 생각나지 않지만 받아들이는 제 입장에서는 마찬가집니다. 이미지 범람의 시대에 사진은 공짜라는 인식도 한 몫 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마음 상해도 회사 찾은 손님인데 버럭 화낼 수도 없고 대신, 찍는 사진 컷 수를 대폭 줄이는 식으로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내 사진은 그리 쉽고 간단한 사진인가?’를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령 비슷한 인물사진이 있는데 하나는 1년차 때 찍은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15년차 때 찍은 사진이라고 한다면 이 사진은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요. 그 전..

사진이야기 2014.12.29

내 멋대로, 2014 내가 만난 사람들

한 해 동안 찍은 사진을 훑어보았습니다. 올해 제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사진 찍을 당시 상황들이 빠르게 스쳐갔습니다. 사진으로 기록된 순간은 더 또렷하게 기억되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내가 올해 만났던 사람들을 정리해 보자'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매년 10명 정도 그해 만난 사람을 기록해 두는 것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014년에 제가 만난 사람을 제 마음 가는대로 골라 정리했습니다. 여기에 끼지 못했다고 섭섭해 하실 분은 없으실 테지요. 이런 식으로 2014년을 정리해 봅니다. 건축가 승효상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입니다. 경향신문에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를 연재하고 있지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는 ‘백사마을’ 재개발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분입니다.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마을은..

사진이야기 2014.12.23

실패한 새 사진

가창오리를 수소문했습니다. AI(조류플루엔자)를 매개했다하여 천덕꾸러기가 되기도 한 겨울철샙니다. 새 사진을 찍어본 지 오래고 해마다 변하는 서식지 등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 분야에 전문가인 J일보 A선배께 전화를 했지만, 가창오리에 대한 확실한 정보를 건질 수 없었습니다. 선배의 조언대로 철새가 많이 관찰되는 지역의 철새조망대와 지자체에 문의를 했습니다. 결국 가창오리가 해남 지역에 가장 많다는 정보를 입수하게 됩니다. 오랜만에 새를 찍으러 가는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해남 지역에서 철새 모니터링하는 분과 연락이 닿았기 때문입니다. 예보와 다르지 않은 날씨와 적절한 렌즈의 선택만이 관건이었지요. 머릿속에선 언제가 보았던 가창오리의 군무 사진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사진이었지요. ‘..

사진이야기 2014.12.17

사진 번뇌

충북 영동 백화산에 안긴 반야사는 일찌감치 해가 졌습니다. 일학 스님과 차담을 나눈 뒤 컴컴해진 대웅전 앞마당으로 나섰습니다. 방금까지 실내조명에 적응된 눈에 서서히 밤하늘의 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어둠에 완전히 눈이 적응될 즈음 하늘 가득한 별들이 쏟아질 듯 시야에 들어왔습니다. 그 장면은 “아~”하는 감탄사 이상으로 표현할 길이 없네요. 별들을 한참 올려다보다 초등학생 때 경남 어느 산골로 갔던 교회 수련회를 떠올렸습니다. 그때 밤하늘에 별들은 어린 저를 압도했습니다. 은하수라는 것을 그날 처음 봤습니다. 그날 이후 세뱃돈으로 싸구려 천체망원경을 사서 하늘을 살피곤 했었지요. 템플스테이를 취재하러 온 절간에서 별 때문에 예배당 수련회를 떠올렸다는 게 재밌다 생각했습니다. 앞서 해가 넘어가기 전..

사진이야기 2014.11.10

찍느냐 마느냐

지난 달 21일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탈북자 단체 회원들이 ‘대북전단’을 날린다는 내용의 일정 보고에 데스크는 망설였습니다. 이런 행사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해 온 신문의 편집 방향에 비춰 게재 확률은 떨어지고 주기적으로 실시하는 삐라 살포에 왕복 두 시간 이상 거리는 빠듯한 취재인력에 데스크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지면에 사진으로 쓴다 해도 이 단체가 의도하는 정치적 메시지만 전달해 주는 것이 아니냐는 것도 고려되는 부분입니다. 몇 차례 대북전단 취재를 해본 제 경험으로는 풍선에 매단 전단을 정확히 북으로 날려 보내는 것보다 행사에 대한 언론의 주목에 더 의미를 두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많은 단체들이 그러하듯 조직의 존재와 사업 내용을 알리기 위해 언론의 취재만큼 효율적인 수단이 없지요. 북한이 전..

사진이야기 2014.10.10

번개를 왜 찍을까?

번개 사진 찍어보셨나요? 지난 29일 밤 야근 중에 번개가 내려쳤습니다. 번개 칠 때의 행동 매뉴얼이 있는 것처럼 사무실 창을 열고 카메라를 하늘을 향해 고정시킵니다. 그리고 릴리즈를 이용해 저속으로 촬영합니다. ‘똘똘한 놈 하나만 걸려라’는 심정으로 반복해서 셔터를 누릅니다. 창을 열면 저만치 서울N타워가 보여 다른 앵글을 찾아 밖으로 나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한 자리에서 우직함만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하늘을 가르는 번개를 카메라에 담는 것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눈에 본 대로 사진에 새겨지지도 않고 셔터 타이밍을 놓쳐 눈으로만 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기술이나 경험보다는 운에 '잘~' 기대는 것이 최선입니다. 단순 반복 셔터질을 하다 문득 ‘내가 왜 이걸 하고 있을까?’ 물었습니다. 복잡한 작업이..

사진이야기 2014.09.03

소설을 품은 사진

가끔 어떤 장면은 ‘서둘러 셔터를 눌러라’ 명령을 합니다. 몸과 마음이 급해집니다. 흘러가버려 다시 담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그 ‘아쉬움’이 생각보다 짙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자리 잡고 명령을 충실히 수행합니다. 일단 찍고 본다는 게 더 정직한 표현이겠지요. 경험적으로 이렇게 얻는 사진들은 신문에 쓸 사진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어디 쓰냐구요? ㅋㅋ블로그에 씁니다. ^^ 찍은 뒤에 무엇이 찍게 했는지, 왜 찍었는지를 다시 생각합니다. 그 ‘명령’은 장면을 기록하는 일에 익숙해진 몸의 명령인지, 움찔하고 순간적으로 느끼는 가슴의 요구인지도 답하기 어렵습니다. 사진을 노트북에 띄워놓고 다시 추궁합니다. 왜 찍었냐고. 찍은 당시의 상황을 세밀하게 더듬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모니터 위에서 보는 사진과..

사진이야기 2014.08.29

사진가 노순택

어떤 현장에서는 사진가 노순택을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까맣게 탄 얼굴에 등산복과 등산화를 신고 스윽 나타난 그는 참 부지런히 사진을 찍었습니다.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말이지요. 용산, 평택, 제주 강정, 밀양에서 그를 만났고 쌍용차 해고자들 사이에서도 그는 보였습니다. 그의 카메라는 대한민국 갈등의 현장에서 권력을 조롱하고 권력의 반대편에 있는 이들을 어루만집니다. 언론이 뜨겁게 모였다 빠져나간 곳에서도 그의 카메라는 머물러 있습니다. 어느 밀양 송전탑 관련 문화제에서 사회자가 “노순택 사진가도 함께하고 계십니다”라는 멘트를 할 정도입니다. 사진을 ‘업’으로 하는 직업인이지만 활동가이기도 한 것이지요. 금세 떠나버리는 사진기자보다 머물러 함께하는 사진가의 카메라가 더 ..

사진이야기 2014.0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