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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날 해바라기를 찍었다

오랜만에 나선 지방 출장이 의욕을 부릅니다. ‘1타3피!’ 한 번 나서서 3건을 처리하겠다는 것이지요. 회사 주변만 오가다 서울을 벗어나서 좋습니다. 그렇다고 들뜨고 신나고 그런 건 아닙니다. 일이니까요. 2박3일 일정을 짰습니다. 이틀째 경남 김해 취재가 메인, 앞뒤로 한 건씩의 사진취재를 엮었습니다. 김해로 가는 길에 경북 영주를 들러 한 건을 처리했습니다. 그날 저녁과 다음날엔 김해에서 예정된 사진을 찍었습니다. 마지막 ‘3피’째 변수가 생겼습니다. 서울 가며 가까운 함안에서 해바라기를 찍을 계획이었는데 ‘아직 이르다’더군요. 망설였습니다. 확실히 펴 있는 해남을 가야하나. 이틀째 일정을 마치고 전남 해남으로 달렸습니다. 시원하게 펼쳐진 해바라기를 한 번 (찍어)보고 싶다는 애초의 생각을 떨치지 못..

사진이야기 2019.07.25

고통을 찍는다는 것

사진다큐의 절반은 소재를 찾고 선택하는 일입니다. 사진으로 표현되는가가 가장 큰 고민이지요. 소재를 고르는 데는 자연스럽게 사진기자로서의 경험이 작용합니다. 확실한 건(이것도 경험인데요), 그런 경험이 소재의 폭과 참신함을 보장해주진 않는다는 겁니다. 외려 지난 경험이 쉬운 단념과 적당한 타협을 부추깁니다. ‘이건 이번엔 안 되겠네’ 싶어 포기하거나 다음 기회를 도모하지만 한편으로 찜찜해하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내가 포기하는 이 소재를 멋지게 표현해 낼 거야.’ 유연함과 용기를 앗아가는 경험이란. 다큐를 앞두고 두어 개의 소재를 종이에 낙서처럼 써놓았습니다. 죄 없는 종이를 쏘아보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던 중에 예정에는 없던 ‘가습기살균제사건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가게 됐습니다. 특조위가 ..

사진다큐 2019.07.22

쓰지 못한 사진이 하는 말

쓰지 못한 사진이 말을 걸어옵니다. 사진다큐를 하면서 오래된 주상복합건물 벽에 새겨진 벽화를 찍었습니다. 건물 내부 ‘ㅁ’자 중정 위로 솟은 두 벽면의 부조인데요. 50년 전에 시내 중심에 지은 화제의 건물이라, 어느 이름 난 작가의 작품이겠지 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부조는 건물 벽에 시멘트를 바르던 미장장이가 새겨넣었습니다.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찾을 수도 없었다는 얘기를 건물 관계자로부터 들었습니다. ‘무명의 미장장이가 남긴 50년 된 부조벽화.’ 이름 난 작가의 것이었다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을 테지만, 무명의 인부가 남겼다는 말에 울림이 생겼습니다. ‘다큐의 메인은 바로 이거다’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이 벽화 사진에 집착했고 글도 이 장면으로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오래된 건물 곳곳에서 ..

사진이야기 2019.06.19

"영은씨, 상우씨 행복하세요~"

지난해 취재했던 ‘노들장애인야학’의 교사와 통화를 했습니다. 야학에서 발간하는 계간 소식지봄호에 제가 보낸 글이 잘 실렸나, 언제 나오나, 문득 궁금해서였습니다. 안부도 물을 겸 해서 말이지요. 얘기 끝에 무심코 던졌습니다. “장애인의 날 앞두고 관련 다큐를 하려는데 뭐 없을까요?” 답을 바라고 한 말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결혼을 준비하는 커플이 있는데...” “아, 그래요?”라며 차분히 되물었지만, 속으로는 ‘바로 이거다’며 만세삼창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비부부 상우씨와 영은씨를 만났습니다. 둘은 장애인시설에서 ‘서로’ 짝사랑을 했습니다. 시설 내에서 연애는 허락되지 않아 만나지도, 표현할 수도 없었습니다. 둘은 우연하게 같은 날 ‘탈시설’을 했습니다. 우연 아닌 필연이지요. 같은 공간에서 ..

사진다큐 2019.05.08

다섯 번째 봄

세월호 참사 후 다섯 번째 봄이 왔습니다. 이전의 봄과는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이제 4월은 더 이상 옛날의 4월이 아니”라는 시를 떠올립니다. 다시 4월, 다시 세월호를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잊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난 세월을 핑계로 희미해지기도 했지요. ‘참사의 기억과 참사 후 각자의 자리에서 품었던 나름의 다짐을 다시 환기할 수 있을까.’ 그렇게 사진다큐를 준비했습니다. 지난해 4월에도 세월호 관련 기획을 했었지요. 단원고 생존학생 장애진씨가 주인공이었고요. 그의 바뀐 꿈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애진씨가 활동하는 생존학생 모임 ‘메모리아’를 짧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다큐에는 ‘메모리아’의 활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섭외를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팠고, 두..

사진다큐 2019.04.11

사람이 먼저

공구상가로 잘 알려진 을지로 일대의 재개발이 진행되는 과정에 논란이 빚어졌습니다. 을지면옥 같은 오래된 가게(노포)를 없애야 하느냐는 등 반대여론이 일자 서울시는 재개발을 다시 검토해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지요. 이 과정이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됐습니다. 서울시의 입장이 발표된 뒤 논란은 조금 잦아들었습니다. 많은 기사들이 이미 나왔습니다만, 을지로를 사진으로 기록해보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찍어 의미를 담을 수 있을까.’ 무작정 골목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무엇’은 손 글씨 간판이었습니다. ‘칠 벗겨진 낡은 간판 위에 정성스럽게 쓴 글씨와 점포의 작명과 역사에 담긴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이리저리 재다가 결국 ‘사람’으로 방향을 슬쩍 돌리고 말았습니다. 골목 안에는 30~..

사진다큐 2019.03.25

버터링쿠키와 아메리카노가 문득 그리워진 날에

1년 전 이맘 때 평창동계패럴림픽 출장에서 돌아왔습니다. 이후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만, ‘1년 전’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순간 그 사이의 많은 것들이 뭉텅 잘려나가 버리고 1년 전의 기억으로 즉시 빨려듭니다. 사진과 함께 기록된 기억은 좀 더 구체적인 기억으로 남는 모양이지요. 지난해 평창에서 올렸던 블로그를 찾아봤습니다. 하루하루의 단상을 써 모았던 글이 출장의 기억을 또렷하게 살렸습니다. 글의 시작은 “두서없이 떠오르는 생각을 일기처럼 모았다. 훗날 사진과 함께 돌아볼 때 입체적으로 기억이 소환될 것”이라 써 놓았네요. 동계올림픽에 비해 관심이 덜한 패럴림픽, 개회식 전에 이미 찾아든 피로, 미투·MB소환 등 굵직한 뉴스에 묻힌 대회, 규칙도 모르는 낯선 종목들, 동료 사진기자..

사진이야기 2019.03.20

터진 봄, 터진 감성

사진기자는 계절을 앞서 감지해야 합니다. 여름이 오기 전에 시원한 물놀이를, 가을이 아직 저만치 있는데 물든 단풍을, 겨울이 미처 닿기도 전에 움츠린 출근길 시민들을 사진에 담습니다. 이것도 업자들 사이에 경쟁이 되다보니 어색하고 설익은 사진으로 억지를 부리는 경우도 부지기수지요. 뭐, 저라고 자유롭겠습니까. 추위가 예년만 못했다고는 하나, 겨울이 지나지 않았는데 다가온 봄을 사진다큐에 담고 싶었습니다. 설 이후 남도의 한 수목원에 연락했습니다. 몇몇 꽃나무에는 꽃망울이 올라왔다고 알려줬습니다. 꽃눈을 ‘잘’ 찍어보기로 했습니다. '출장을 언제가나' 타이밍을 잡고 있는 동안에도 제주와 일부 지역에서 서둘러 핀 꽃사진이 지면에 실리기도 했지요. 조바심이 약간 생겼지만 꿋꿋하게 꽃눈에 집착했습니다. 흔히 관..

사진다큐 2019.02.25

안현수와 사골블로그

제 블로그에 의외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쇼트트랙 전 국가대표 안현수입니다. 지금은 러시아 국적의 빅토르 안으로도 불리지요. 최근 그의 인터뷰 사진을 찍었습니다. 잊을 만하면 글 하나 올리는 나태한 무파워 블로그 15년째. 지금 이 글이 그에 대한 세 번째 글이 되는군요. +2019.2. 하남 자택에서 인터뷰 중인 안현수. 러시아 대표팀의 도핑 문제로 평창동계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이후 언론과 가진 첫 인터뷰였습니다. 도핑 의혹, 은퇴설, 중국 국가대표 코치설, 한체대 플레잉코치설 등 온갖 ‘썰’들에 대해 맘고생하며 눌렀던 말이 많은 모양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언뜻언뜻 예전 그의 훈련장면을 떠올렸습니다. 그와의 첫 대면은 12년 전이었습니다. 2006년 토리노올림픽에서 3관왕을 차지하고..

사진이야기 2019.02.15

'한 번 해볼까요'

올 겨울에 눈이 왔던가, 쌓인 눈은 본 적이 있던가, 싶습니다. 설 연휴 끝나고 출근했더니 강원 영동북부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렸답니다. ‘누굴 보내야 하나?’하는 부장의 눈빛을 읽었고, “제가 함 가볼까요?”라고 자원했습니다. 대개 ‘함 가볼까요?’라는 말에는 이런 뉘앙스가 담겨 있습니다. “일단 가서 보고, 아니면 마는 거 아니겠습니까?” 오랜만에 서울을 벗어나는 일이었습니다. ‘대설’이면 사건·사고의 범주에 드는 사진을 찍어야지요. 내린 눈의 성격에 맞는 사진을 담아야 하는 겁니다. 인제군에 들어서니 날씨는 포근했고 하늘은 파랬습니다. 도로에 ‘대설’이 아니라 ‘소설’의 흔적도 없었습니다. “한 번 가볼까요?”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부령이냐 한계령이냐를 저울질하다 한계령을 택했..

사진이야기 2019.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