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기자 106

'비와 사진기자의 이야기'

가을입니다. 아련한 생각에 잠기게 하는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비 오는 날엔 무슨 생각들 하시나요? 저는 잠에서 깨자마자 창밖을 내다보며 이 비를 어디 가서 어떻게 찍어야 할까를 생각했습니다. 가을비가 우울한 것이 아니라 비를 보며 일을 생각하는 저의 상황이 우울한 것이지요. 제가 유별난 게 아니라 날씨에 민감한 보통 사진기자들의 습관입니다. 수시로 내리는 비지만 다 같은 비가 아닙니다. 비라는 것도 '어떻게 불러주느냐'에 따라 의미와 때론 이름을 갖습니다. 어제의 비는 막바지 더위를 물리고 추위를 부르는 비였지요. 추위 끝에 오는 반가운 봄비, 애잔한 감성을 부르는 가을비, 지긋지긋한 장마나, 물난리를 일으키는 기습 폭우 등 계절과 비의 성격을 따져 의미를 부여하고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를 고민하게 되는..

사진이야기 2013.09.25

힛팅수 경쟁

컴백 가수의 쇼케이스를 난생 처음 취재 간 저는 행사장 입구에서 낯익은 타사 후배의 얼굴이 보이자 반가워서 외쳤습니다. "나 좀 케어 해줘~!" 후배는 프레스카드를 수령하는 절차와 무대 앞에 자리 잡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혼자 못할 것도 없지만 ‘뻘쭘함’에 늘 이런 식의 민폐를 끼칩니다. 한 시간 반 전에 추첨을 통해 자리배정은 이미 끝나 있었구요. 사진, 영상, 취재기자들이 자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지요. 대부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간간이 앉은 아는 선후배들과 떠들썩하게 인사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산만한 저 양반은 누구야?’하는 시선이 느껴졌습니다. 걸그룹 카라가 등장해 새앨범 타이틀곡 ‘숙녀가 못 돼’를 선보일 때 셔터를 누르면서도 곡 사이사이에 쇄도하는 셔터 소리가 연주의 요소인듯 섞여 ..

사진이야기 2013.09.05

내 카메라의 대화

사진을 가르쳐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주제넘게 받아들였습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하나 고민했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방법’을 얘기해볼까 하다가 ‘그 방법을 알면 너부터 잘 찍어라’는 제 안의 질타에 즉시 접었구요. ^^ 그리하여 첫 시간에는 주어진 빛에 적정한 노출을 얻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기로 했습니다. 감도와 조리개, 셔터를 잘 설명해야 했지요. 제게는 너무 익숙한 것이지만 이걸 초보자인 친구에게 쉽게 풀어 설명하는 것은 다른 영역의 일이더군요. 먼지 쌓인 채 방치된 사진서적도 들춰 보았습니다. ‘감도(ISO)’가 ‘감광속도’의 줄임이라는 것을 민망하지만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의심했습니다. 내 수족처럼 다룬다 생각했던 카메라를 나는 제대로 알고 쓰는가, 누군가에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안다고 할..

사진이야기 2013.08.29

투신 현장에 내가 있었다면

사진기자 케빈 카터가 아프리카 수단에서 찍은 ‘독수리와 소녀’는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합니다. 굶주려 힘없이 웅크린 소녀를 먹잇감으로 노리는 것 같은 독수리의 모습은 전세계에 충격을 던져 주었습니다. 이 사진에는 사진가에 대한 찬사뿐 아니라, “셔터를 누르기 전에 아이를 먼저 구했어야 되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케빈 카터는 시상식이 열린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자신의 차에서 자살을 했습니다. 사진에 대한 논란이 그가 자살한 이유라는 주장도 있지만 그가 말하지 않았으니 모르는 것이지요. 다만, 그가 취재했던 수많은 전쟁과 죽음, 기아의 비참한 현장이 그를 늘 괴롭혔고 끝내 이를 견디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케빈 카터가 몇 장의 사진을 찍자 독수리는 소녀를 두고 날아가 버렸다고 합..

사진이야기 2013.07.30

이제 제 어깨 내어 드립니다!

5년 전 축구하다 다리를 다쳤습니다. 깁스를 풀고 오랜만에 현장에 나갔습니다. 현장에서 만난 한국일보 최흥수 기자의 따스함을 그때 블로그에 썼었네요. 진짜 한국일보 기자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법원 결정으로 기자들이 편집국으로 들어갔지만, 취재와 제작은 막힌 상태입니다. 여전히 짝퉁 한국일보가 나오고 있습니다. 최흥수 선배도 열심히 싸우고 있습니다. 5년 전 제게 그러셨듯 이제 제 어깨를 내어 드립니다. 힘 내시고 꼭 이기십시오!!

사진이야기 2013.07.13

포토라인에 서면

경찰에 폴리스라인이 있다면 기자에겐 포토라인이란 게 있습니다. 요즘 매체가 늘어나서 기자들이 몰려드는 어느 곳에나 포토라인이 등장하지만, 포토라인이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은 검찰이나 법원이지요. 한 20년 전쯤 매체가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은 라인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구요. 검찰에 누군가 출두하면 그냥 달라붙어 몸싸움을 벌이며 사진이나 영상을 찍었다고 하더군요. 그 시절 대통령 선거에 나온 대기업 회장님이 검찰에 들어서다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이마를 찧어 피를 흘렸습니다. 그렇게 무질서 했던 것이지요. 포토라인은 그 일 이후로 생겼다고 합니다. 포토라인은 가상의 선이 아니라 눈에 잘 띄는 노란색 테이프입니다. 기자들끼리 질서를 유지해 취재를 하자는 약속의 선입니다. 취재 대상의 힘에 비례해 라인은 ..

사진이야기 2013.07.02

살아 움직이는 사진

사진은 흐르는 시간과 공간을 수십, 수백분의 1초라는 셔터의 칼로 잘라 정지시킨 기록이라 할 수 있겠지요. 분명 소리없이 정지된 기록이지만 어떤 사진은 생물처럼 말을 하고 움직입니다. 시간의 더께가 켜켜이 쌓이며 정지된 시간으로부터 멀어져 갈수록 더 큰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고 또 다른 이야기를 던지기도 합니다. 제게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전 마지막 모습의 기록이 그렇습니다. 검찰 조사를 받고 김해 봉하마을 사저로 돌아오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된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2009년 5월 23일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이 사진을 다시 보았습니다. 다시 본 사진은 그저 단순한 무표정 내지는 무거운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진을 찍고 고르고 트리밍하고 전송을 하면서..

사진이야기 2013.05.24

남양유업의 사과

지난 9일 영업사원의 막말과 제품 밀어내기 등에 대해 남양유업 대표와 임직원들이 대국민 사과를 했습니다. 이날 고개숙인 장면이 사진과 영상으로 신문과 방송에 나가리라는 것은 불보듯 뻔하였지요. 인사하는 모습을 물먹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좋은 자리를 잡기위해 일찌감치 회견장으로 갔습니다. 발디딜 틈 정도의 자리가 남아 있었지요. 겨우 끼어 앉았습니다. 예정된 기자회견 시간은 10시 30분. 사회자의 진행에 따라 10시20분쯤 대표와 임직원들이 등장합니다. 본 회견을 앞두고 일종의 포토타임이 진행되었던 것이지요. 대국민 사과 회견에 '무슨 포토타임까지나...'하고 조금 의아해 했습니다. 대표와 임원들은 두줄로 서서 고개숙였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이고 셔터 소리가 회견장 가득 공명합니다. 포토타임이기에 ..

사진이야기 2013.05.13

뻗치기는 숙명

주기적으로 뻗치기에 대한 얘기를 쓰게 되는군요. 그렇습니다. 피하고 싶지만 피해지지 않는 뻗치기는 기자들의 숙명입니다. 예상된 뻗치기는 마음에 준비라도 하는데 그렇지 못한 뻗치기는 두 배쯤 더 힘듭니다. ^^ 지난 29일 개성공단 내 우리측 잔류 인원의 귀환 취재에 나섰습니다. 입경 시간은 오후 5시 경으로 예정됐고 4시가 채 되기 전 남북출입사무소 내 작은 건물 옥상에 올라 자리를 잡았습니다. 개성에서 돌아오는 차량 행렬이 가장 잘 보이는 곳으로 자리싸움이 치열합니다. 이미 이런 저런 스케치를 마감한 상태였구요. 옥상에서 차량행렬을 보고 잽싸게 내려가 데스크가 준 미션을 수행한 뒤 물류센터로 뛰어가서 짐 옮겨 싣는 것을 취재하고 차로 미친듯이 달려가 노트북 마감하는 동선을 짰습니다. 노트북은 취재차 안..

사진이야기 2013.05.02

파란 봄

신문사 입사한 그해 가을로 기억합니다. 당시 부장께서 외신 사진 한 장을 벽에 붙였습니다. 참신해 보이고 시도해 볼만한 계절 스케치 사진을 그런식으로 붙이셨지요. 바닥에서 벽으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낙엽을 쓸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부장께서 좋다고 생각하신 사진을 어떤식으로든 흉내내 찍어보려 낙엽지는 가을마다 기회를 노리곤 했었지요.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꽤 긴 시간 머릿속에 남아 있던 이미지였습니다. 그제 인터뷰 갔다가 건물에서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사진을 한참 바라보며 '내가 왜 이 사진을 찍었을까?'에 대한 답을 찾았습니다. 기자 초년병 시절 각인된 이미지에 저도 모르게 끌린 것이지요. 가을이 아닌 봄이, 빗자루 대신 롤러가, 낙엽 대신 파란 페인트가 그 자리를..